오목교

1978년-1980년 언저리

by 서완석

제2화 숙희(1)


”숙희야”

“이 년은 에미가 왔는디 코빼기도 안 보이고 뭔 지랄을 하고 있는 거여?”

아줌마는 빽소리를 질러놓고 영석을 바라보았다.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데, 그의 얼굴에 뜻 모를 슬픔이 비치는 듯했다.

“그런디 옆집에 총각이랑 누나가 이사 왔다는 소식은 들었는디, 또 다른 사람은 같이 안 사능가?”

갑자기 아줌마가 영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영석은 아줌마의 말투에 남도 사투리가 섞여 있는데 저 멀리 아래쪽은 아니고 조금 위쪽인 것 같은데, 그렇다고 충청도는 아닌 것 같고 정읍이나 김제 혹은 부안 사투리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누나하고만 살아요”

“내 고향은 곰소여, 총각은 곰소 아능가?”

“아 네 압니다. 젓갈하고 풀치 조림이 맛있는 곳이죠”

“워메 곰소를 아능구마이, 서울 사람들은 풀치가 뭔지 모르제”

아줌마는 고향 이야기가 나오자 아주 신이 나서 풀치 조림과 젓갈 자랑에 침이 말랐다. 젓갈이라면 강경과 광천 그리고 곰소 아니던가.


영석은 엄마가 해풍에 꾸덕꾸덕 말린 풀치에 꽈리고추를 넣고 빨간색 고춧가루를 넣어 만들어 주던 풀치 조림이 생각났다. 갈치조림은 쉽게 살이 부서져도 풀치는 살이 부서지지 않으니 크기는 그만 못해도 실속이 있고 쌀밥에 국물을 적셔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라 어릴 때부터 참 좋아하던 음식이었다.

“오늘도 아모레 화장품 가방을 메고 또 얼마나 돌아다니고 계실까?”

영석은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나서 가슴이 시큰거렸다.

근동에서 외갓집 땅 밟지 않고는 동리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지만 외할아버지가 기생을 첩으로 들이면서 외가는 서서히 집안이 기울었고, 친가 역시 할아버지가 첩을 들이고 큰아버지가 정치에 발을 담으면서 기울기 시작했던 건 마찬가지다. 게다가 아버지마저 일찍 돌아가셨으니 엄마의 고생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일이다.

엄마는 맨날 “백말띠는 팔자가 드세다는데”라고 하시며 당신의 사주팔자가 안 좋다는 걸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부잣집에서 어릴 때 보고 들은 것들이 많아서인지, 타고난 재주 탓인지 몰라도 음식 솜씨나 손재주가 아주 뛰어나셨다. 엄마는 재봉틀 하나만 있으면 할아버지의 두루마기며 마고자, 그리고 자식들 옷가지 등을 기가 막히게 만들어 냈다. 오죽하면 시집갈 과년한 처녀들이 바느질이나 다른 기술을 배우러 밤마다 영석의 집에 마실을 왔겠는가?


“숙희야! 이년이 도대체 어딜 간 거여?”

영석이 잠시 생각에 잠긴 모습에 곰소에 대한 자랑도 시들해졌는지 아줌마는 다시 숙희를 찾았다.

영석은 아줌마가 온 뒤부터 사내가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다.

아줌마는 수돗물을 손으로 받아 얼굴과 목덜미를 쓱쓱 문지르고 다시 손으로 물을 받아 벌컥벌컥 마시더니 방으로 들어갔다.

“아따 이년이 전기세가 아까워 죽겄는디 선풍기 씨게 틀어놓고 천하태평으로 자고 있네”

“어서 일어나 이 년아, 숙제는 했냐?”

“모르는 것은 아빠한티 물어서 숙제도 하고 집안 청소도 해놓고 그래야제, 뭐하는 것이여? 이 잠충이야”

“병든 아빠가 청소를 하겄냐, 밥을 허겄냐, 돈을 벌어 오겄냐, 이 오살할 년아, 육시를 할 년아, 속창알머리 없는 년아”


안에서는 아줌마가 딸을 깨워 닦달하는 듯 소란이 계속되었지만, 사내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조금 있으려니 부은 눈을 비비며 숙희라는 아이가 걸어 나오는데 바가지 머리에 앞머리는 집에서 가위로 자른 듯 일자 형태로 비뚤비뚤 제멋대로였다.

숙희는 사내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불퉁스럽게 한 마디를 내뱉으며 산수책과 공책을 사내 앞으로 툭 던졌다.

“아저씨 산수 문제 좀 풀어줘요”

“아니 아저씨라니” 영석은 혼란스러웠다.

사내는 신문지를 찢어 글자가 없는 부분에 산수 문제를 풀더니 숙희에게 휙 던졌다. 숙희는 평상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연필에 침을 묻혀 사내가 써준 것을 그대로 공책에 옮겨 적는 듯했다.


“어이 집에 TV 있나?”

사내가 침묵을 깨고 영석에게 물었다.

“네 흑백 진공관 TV가 있는데 잘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6시부터 김성준 선수와 태국 챔피언 네트로이 보라싱의 WBC 라이트 플라이급 세계 타이틀 매치가 있는 것 아나”

“네 조금 있다 TV로 볼 생각입니다.”

“그럼 내가 이 평상에 모기장을 치고 잠을 자고 있을 건데, 나도 중계방송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볼륨을 좀 높여줄 수 있겠나?”

“네 그러죠”

영석은 사내로부터 드디어 놓여날 수 있을 것 같아 얼른 대답하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오빠 나도 가도 돼요?”

숙희가 평상에서 발딱 일어나더니 영석의 뒤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한편으로는 누나가 전기세 많이 나온다고 꾸중을 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영석은 오빠라는 소리가 그리 싫지는 않아 싱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김성준 선수는 소매치기 출신이다. 어린 시절부터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하다 14세에 가출하여 어둠의 세계에 들어갔지만 지나가던 여자의 가방을 훔쳐 그 속을 살펴보니 하루 종일 시장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콩나물을 팔아 번 돈임을 직감하고 길바닥에 앉아 울고 있는 그녀를 찾아가 가방을 돌려준 후 복싱 세계에 입문한 아주 잘생긴 선수다.


오후 6시쯤 누나는 아직 퇴근을 하지 않았는데 영석이네 집에 TV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모였다. 숙희 엄마는 감자를 삶아 소금과 함께 들고 왔다. 좁은 공간에 퀴퀴한 땀 냄새와 담배 냄새 등이 섞여 숨쉬기가 곤란했지만 모두 흥분한 상태였다.

영석은 옆집 사내도 들을 수 있게 볼륨을 최대한으로 높였다.

그때 누나가 들어섰고 깜짝 놀라는 눈치로 영석을 바라보았지만, 영석은 애써 누나의 눈을 피했다. 감자도 있고 누군가 가져온 개떡과 삼립식품의 보름달 빵, 그리고 막걸리와 소주도 있으니, 잔치라도 열린 기분이라서 그저 좋았기 때문이다. 누나도 곧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분위기를 맞추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WBC 세계챔피언으로서 작은 탱크로 불리는 보라싱의 우세를 점치면서도 김성준이 이길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김성준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소리를 질러댔다.

1라운드에 김성준은 신중하게 잽과 스텝을 사용하며 탐색전을 펼쳤다.

2라운드에는 김성준이 조금씩 페이스를 올리며 빠른 원투와 바디공격을 섞어 주도권을 잡는 듯했다. 그러나 보라싱도 강하게 밀고 들어왔다. 영석은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3라운드 들어서면서 김성준이 본격적으로 공세로 전환해 보라싱을 로프에 몰며 강한 펀치를 적중시켰다, 아나운서는 보라싱의 얼굴에 충격이 쌓이는 것 같다고 했다.

3라운드 후반에 접어들면서 김성준의 강력한 라이트 훅이 보라싱의 복부를 강타하자 그가 쓰러졌다.

그때 가장 뒷줄에 서있던 김씨 아저씨라는 분이 가슴을 움켜쥔 채 쓰러졌다.

아무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 옆에 서있다 이를 발견한 영석이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

“아저씨, 저 좀 봐요. 숨을 크게 쉬어 보세요.“

김씨 아저씨는 가슴을 부여잡고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감자를 입에 물고 있던 숙희가 이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달려 나갔다.

"아저씨, 아저씨 이리 와봐 김씨 아저씨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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