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교

1978년-1980년 언저리

by 서완석

제3화 성당과 신부님(1)


학원 수업이 끝나자마자 영석은 책을 덮고 가방을 챙겼다. 서두르는 발걸음과 마음은 무거웠다. 누나가 ”다음 달 학원비를 마련해 줄 수 없을 것 같다 “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이제 이 길도 곧 마지막이겠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고 그 무거움이 어깨로 내려앉았다.


인사동 골목길로 접어들자, 필방, 고문서, 도자기, 불교 관련 물건들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어디선가 흘러나온 듯한 묵향이 코끝을 스치고, 향내도 느껴졌다. 어린 시절 큰아버지 앞에서 먹을 갈 때 맡았던 익숙한 향내와 선운사에 갈 때마다 맡았던 향내에 잠시나마 마음이 따뜻해지며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성불사, 만물상회, 오봉공예, 정일품, 동헌필방....

줄줄이 늘어선 간판들을 하나씩 읊조리다 피맛골로 들어서자 기름 냄새가 몰려왔다. 생선을 굽는 냄새, 전을 부치는 냄새때문에 영석의 허기진 배는 염치도 없이 식욕을 사정없이 자극했다. “고소한 전 하나만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은 생각에 영석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전 정부가 물가대책위원회를 열어 버스비를 50원으로 올렸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지하철도 50원, 택시는 250원. 토큰이 없으면 버스는 60원이라, 영석 같은 재수생에겐 그것마저도 부담이었다. 중·고등학생들은 은백색 토큰으로 35원만 내면 되지만, 그는 황동색 50원짜리를 내야 했다. 며칠 전에는 여성 안내양들이 토큰을 삥땅 했다는 이유로 몸수색까지 당했다는 소문을 들은 터라 넙데데한 안내양의 얼굴이 오늘따라 한없이 측은해 보이면서 가슴 한편이 저릿했다.


오늘도 세 정류장을 지나쳐 집으로 향하는 길, 마을 입구에서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던 숙희가 땀에 젖은 얼굴로 달려왔다.

“오빠 오늘 교회 안 갈래?”

얼굴은 땟국물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커다란 눈과 오뚝 솟은 코가 햇볕을 받아 반짝였다.

“교회? 여기에 교회가 있어? 한번 가볼까? 그런데 나 아직 밥을 못 먹었는데”

“응 그럼 나 세수하고 기다릴게. 밥 먹고 날 불러”

“그래”


집안은 마치 찜통 같았다. 방문을 열자마자 후끈한 열기가 훅 덮쳐왔다.

아침에 누나가 봉지 쌀을 사다가 보리를 섞어서 지어놓은 밥 한 덩이가 남아 있었다. 물에 말아 양파와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허겁지겁 입에 밀어 넣었다. 아침에 길어온 펌프 물은 7월의 열기에 이미 데워진 듯 뜨끈했지만, 대충 얼굴만 씻고 숙희네로 향했다.


영석은 평상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사내를 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

“숙희 있나요?”

“응 아까 방에 들어갔어”

“아 네, 숙희가 교회 가자고 해서요” 영석은 사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이며 머쓱하게 웃었다.

사내는 잠시 영석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신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여전히 그는 기침과 함께 뱉어낸 가래를 신문쪼가리로 닦아내고 있었다.

“그래 복음자리교회에 외국 신부님이 계시다더군. 배우는 게 많을 거야 가보는 것도 좋지”

그때 숙희가 빼꼼히 밖을 내다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오빠 왔구나! 조금만 기다려”


교회로 가는 길에 숙희는 연신 말이 많았다.

“우리 신부님 진짜 멋있어, 교회 가면 맛있는 것도 주고, 공부도 가르쳐 줘”

“미사 드릴 때,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오 하고 외치면 내 맘이 씨원해져” 숙희는 쌍시옷 발음을 세게 하면서 동시에 자기 가슴을 두드렸다.

“부활절에는 예쁜 달걀도 나눠줘”

숙희는 영석의 손을 꼭 잡고 새처럼 통통 튀며 그의 걸음에 발을 맞췄다.

“그런데 오빠 손은 왜 이렇게 따뜻하지? 울 엄마 손은 아주 찬데”

“네 손도 따뜻해”

숙희의 조그만 손의 온기가 영석의 손에 전해지며 영석의 얼굴에 모처럼 웃음이 번졌다.


오목교 입구를 지나 안양천 둑길을 따라 들어서자, 판자촌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영석이 이곳으로 이사를 온 후 처음으로 마을 전체를 보게 된 것인데, 마을에는 똑같은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늘어서 있었다. 영석은 속으로 마을의 규모를 가늠해 보았다. 줄잡아 2천여 세대, 한집에 서너 명이 산다고 생각하면 주민의 수는 8천 명 정도가 될 듯싶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좁디좁은 집들 속에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 우리 꼬마 숙희 자매님! 어서 오세요”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조금 있으면 대머리가 될 듯한 벽안의 신부가 활짝 웃으며 숙희를 덥석 안아 올렸다가 내려놓으며 손을 내밀고 있었다. 단정한 클러지 셔츠와 검은 양복 차림, 그의 모습은 판자촌 풍경과 묘하게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해 보였다.


“이 형제님은 누구실까?”

“네 저는 이영석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 그래요, 존 밀러 신부라고 합니다.”

외국인의 억양이었지만, 그의 한국말은 유창했다.

영석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개신교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신부님이라니. 교회 안을 둘러보는데 판잣집과 다를 바 없는 공간에 제대 하나, 백열등 하나, 벽에는 십자가 하나뿐이었다. 자신이 다녔던 가톨릭계 고등학교 성당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곳에는 스테인드글라스와 마리아상, 감실, 그리고 예수의 수난을 묵상하는 14처의 성화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성당이라고 하기엔 부족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리에 계십니다. 크기가 무슨 대수겠습니까?”

밀러 신부의 말에 영석은 마음속을 들킨 듯 흠칫했다.


신부는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1960년,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회에 들어가 미국 일리노이에서 한국으로 왔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가 1966년 사제 서품을 받고 다시 이 땅에 돌아왔지요. 1969년에는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에 항의하려고, 제 명함에 ‘대한아 슬퍼한다. 언론자유 시들어간다’는 글귀를 새겨 명동 한복판에서 1인 시위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추방 명령을 받았지요.”


‘박정희’, ‘언론탄압’, ‘시위’, ‘추방 명령’이라는 단어들이 밀러 신부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자 영석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어 얼른 누가 없나 주위를 살폈다. 오늘도 장발 단속에 걸릴까 싶어 곱슬머리에 찬물을 발라 한껏 누르고 학원에 다녀왔고, 경찰들이 여성들의 미니스커트 길이를 재는 모습이라도 보이면 경찰이 “이리 와” 할까 봐 얼른 뒷골목으로 도망쳐오곤 했기 때문이다. 또한 올해 2월에도 인천에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가 영등포역에 밤 11시 반경에 도착해서 택시를 잡았는데 경찰의 통행금지 단속에 걸릴 것을 걱정한 택시 운전사가 “뒷트렁크에라도 타고 가려면 타세요”라는 말에 군말 없이 온몸을 구겨 넣고 집까지 갔다가 땀이 흠뻑 젖어 된 통 감기에 걸려 고생했던 기억도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부님, 어떻게 지금 한국에 계신 건가요?”

“내가 봉직한 대학교의 총장이 힘써 주셔서 간신히 추방을 면했습니다. 그 일을 겪고 난 후 청계천 판자촌 사람들의 삶이 궁금해졌어요”


“신부님! 저 배고파요”

숙희가 아주 씩씩한 모습으로 끼어들었다.

밀러 신부님이 웃음을 터뜨렸다. 영석도 모처럼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판잣집의 허름한 천장 불빛 아래, 그 순간만큼은 이상하게 따뜻한 평화가 깃드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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