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1980년 언저리
제3화 성당과 신부님(2)
며칠 후 금요일 저녁에 밀러 신부가 영석의 집을 찾아왔다.
누나는 정성스럽게 달걀 한 알을 넣어 라면을 끓인 후, 이를 양은 소반 위에 올리고 숙희네서 얻어 온 김치까지 곁들여 밀러 신부 앞에 내어놓았다.
“대접해 드릴 게 이것밖에 없어서 너무 죄송해요”
“아닙니다. 최고의 밥상입니다.” 밀러 신부는 손으로 성호를 그었다.
“그런데 두 분은 안 드십니까?”
“아녜요 우리는 이미 먹었어요. 배불러요”
영석은 저녁을 먹은 기억이 없다. 밀러 신부는 라면 한 그릇을 국물까지 싹 비웠다.
누나는 종교편력이 심한 편이다. 중학생일 때는 한국예수교전도관이란 곳을 다녔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말일성도 예수그리스도교에 깊이 빠진 적도 있으며, 잠시 교회를 다닌 적도 있다. 누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닐 때 전교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다. 그러나 집안 형편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지 못하고, 야간 상업계 고등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는 현실에 절망하고 있었기에 정신적으로라도 어떤 믿음에 매달려 암울한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영석은 자주 했다.
며칠 전 영석이와 숙희가 복음자리교회를 찾은 후 밀러 신부는 영석이네가 어떻게 사는지를 보려고 일부러 찾아오셨다고 했다. 그리고 겸사겸사 해서 오랜만에 숙희네도 함께 방문하시기로 하셨다고 했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 미안합니다. 원하신다면 이 집에 축복을 내려주고 싶어서요”
“당연히 원하죠, 얘도 내년에 좋은 대학에 꼭 입학할 수 있도록 같이 축복 해주실 수 있나요?”
“그럼요”
밀러 신부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라고 말씀하신 후, 하느님의 은총이 영석의 집에 머물기를 바란다는 기도를 하고 또 영석의 머리에 손을 얹어 간절히 기도하셨다. 그리고 영석이네 방 네 귀퉁이와 영석이를 향해 준비해 온 성수를 뿌렸다.
“부디 원하시는 바를 모두 이루십시오, 그리고 마음이 허락할 때 우리 교회도 방문해 주세요”
누나는 감동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일이라도 성당에 나갈 생각을 굳힌 것 같았다.
“이제 곰소댁네 가서 정선생님을 뵙고 곰소댁과 숙희를 만나봐야겠어요”
영석은 그 사내가 정선생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고 숙희네 엄마가 곰소댁으로 불린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정선생님은 어떤 분이세요?” 누나가 조심스럽게 밀러 신부에게 물었다.
“우리 마을의 최고 지식인이죠”
“오랫동안 사법고시를 준비하시다가 걸린 몹쓸 병으로 고생하고 계시지만, 우리 동네 사람들의 법률적 문제나 주민들이 관공서 관련 일로 힘들어할 때, 큰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우리 마을 주민들의 학력 수준이 매우 낮고 글을 모르는 분들도 너무 많아서요”
“그리고 이 마을에서 신문을 구독하는 몇 안 되는 분 중 한 분이시죠”
“사법고시 1차 시험은 여러 번 합격하셨는데 매번 2차 시험에서 간발의 차이로 불합격하셨다는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을 통해 들었어요”
“최근에는 건강이 뒷받침해주지 못하니 더 이상의 시험 보기는 포기하셨다고 합니다” 밀러 신부가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그런데 정선생님과 곰소댁은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누나는 평소 가지고 있던 의문점을 밀러 신부님을 통해 모두 풀어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건 저도 자세히 모릅니다. “
밀러 신부님은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영석과 누나도 일어서서 밀러 신부님을 따라 숙희네로 갔다.
평상에 앉아 연신 부채를 부치며 모기를 쫓고 있던 사내, 아니 정선생이 밀러 신부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영석은 정선생이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곰소댁도 숙희와 함께 뛰어나와 밀러 신부를 반겼다.
“오메! 신부님이 어떻게 우리집까정 요로코롬 방문을 해주셨당가요?”
“아, 네! 영석이 형제님과 자매님 축복을 해주러 왔다가 정선생님과 곰소댁도 뵙고, 그리고 우리 숙희도 보고 싶어서요”
“오메 반가운 거, 근디 저녁은 아직 안드셨지라우”
“아닙니다. 이 자매님 댁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어서 이주 배가 부릅니다.”
밀러 신부는 누나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누나는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라면 한 그릇이 전부였는데요, 뭘” 하고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신부님! 정부에서 이 마을을 철거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던데 혹시 주워 들은 이야기는 있으신가요?” 정선생이 말했다.
“뭐라고라 여기가 철거된다고요?” 곰소댁이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제 친구 지정수 군이 1975년에 청계천 주민들과 시도했던 집단이주계획이 실패한 후, 그해 11월에 주민들을 이곳으로 이주시킨 후 저를 만나 친구가 되었어요, 그 친구는 정선생님도 잘 아시잖아요”
“그럼요 잘 알죠. 정말 대단한 친구지요. 신부님과 그 친구가 2년 전 부엌까지 합해도 5평이 될까 말까 싶은 공간을 사랑방으로 만들어 ‘복음자리’를 만든 거 아녜요?”
“맞아요! ‘복음자리’라는 이름은 김수환 추기경님이 지어주시고 직접 현판식에도 참석하셔서 미사를 집전하시고 우리의 새로운 여정을 축복해 주셨어요”
“맞습니다. 그리고 추기경님께서는 독일교회의 해외원조기구인 미제레올(Misereor)에 손수 편지를 쓰셔서 지원을 요청하셨잖아요?” 정선생은 기침을 최대한 참으려 하면서 밀러 신부나 다른 이들과 거리를 두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밀러 신부는 정선생과 스스럼없이 악수도 하고 이야기 도중에 그를 껴안기까지 했다.
“추기경님 덕분에 제가 독일에서 미화 10만 달러를 들여와 경기도 시흥에 3600평 규모의 부지를 마련해서 벽돌을 찍고 이주를 계획하고 이를 실행 중이예요”
“아이고 그러시구만요. 그럼 우리 같은 사람들도 거기로 이주할 수 있을랑가요?”
곰소댁이 희망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는 가능한 많은 사람을 이주시킬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만.....”
밀러 신부의 말이 조금 힘을 잃은 듯했다.
“제 친구 지정수 군이 정말 열심히 뛰고 있고 아름이 엄마도 그를 도와 170세대가 지금 이주해서 손수 벽돌을 찍어가며 집을 짓고 있어요”
“지정수 선생님은 ‘빈민 운동의 대부’, ‘가난한 이들의 벗’이예요”
정선생이 말했다.
“그럼요! 오죽하면 추기경님께서도 그 친구를 ‘자신의 스승’ 또는 ‘선생’이라고 하시겠어요”
“그분 서울대 나오신 분 아녜요?”
누나가 영석을 흘낏 보며 말했다.
“오메 서울대요?” 곰소댁이 놀란 눈으로 누나를 바라봤다.
“아니 서울대 나온 양반이 왜 우리같이 천한 것들을 돌봐주며 생고생을 하신다요?”
“서울대 나온 사람이나 국민학교도 못 나온 사람이나 사람이기는 마찬가진데 왜?”
정선생이 꾸짖듯이 말하며 곰소댁을 바라보았다. 누나는 아주 민망한 표정으로 영석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신부님 저 내일 또 성당에 놀러가도 돼요?”
“그럼 당연하지, 그런데 우리 숙희는 유행가는 기가 막히게 부르면서도 동요나 성가는 하나도 아는 게 없는가 보더라”
“유행가는 뭐 노래가 아닌가요?”
숙희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밀러 신부를 바라봤다.
“아따! 이 잡것이 신부님 앞에서 버릇없이 뭐 하는 짓이여?” 곰소댁이 빽 하고 소리지르자 숙희는 영석이 뒤로 급하게 숨었다.
“아이고 죄송하구만이라우, 저년이 지아빠에게도 아빠라 하지 않고 아저씨라고 한당게요?”
밀러 신부는 아무런 말도 없이 미소 띤 얼굴로 영석이 뒤에 숨은 숙희를 바라보았다. 숙희는 영석이 소매를 더 꼭 붙잡았다.
"정선생님! 이 약은 한국 내에서 구할 수가 없는 약으로 파라아미노살리실산과 에티오나미드라는 약인데, 미국 미네소타 의대에서 구한 특별한 약이예요. 요즘 한국에도 절실하게 필요한 것들이죠"
밀러 신부가 꼭꼭 싸매서 들고 온 약을 정선생에게 내밀었다.
"이게 진짜 효과가 있을랑가요?" 곰소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치료하면 하느님도 감복하셔서 낫게 해주실 것입니다. 메스껍거나 구토, 복통, 설사 등이 있을 수 있다고 하며 간독성이 있다고 하니 우선 먹는 걸 잘 드셔야 합니다. 특히 에티오나미드는 맛과 냄새가 아주 고약해서 복용이 힘들다고 하는데 정선생님은 워낙 정신력이 강해서 충분히 견뎌내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메 신부님! 이 은혜를 어찌코롬 갚는다요? 지가 책임지고 잘 멕여볼라요" 공소댁이 눈물을 흘렸다.
정선생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할 뿐이었다.
“그나저나 신문에서는 내일부터 큰비가 내린다고 하는데 걱정입니다.”
정선생이 축 쳐진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듯이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안양천은 하천의 길이가 짧아 집중 호우 시 물이 빠르게 불고 급류로 변하는 특징이 있어서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할 때면 밀물 시 한강의 물이 역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이 일대는 저습지로서 홍수 시에 침수하는 상습 수해지거든요”
정선생과 밀러 신부의 이야기 주제는 비로 바뀌었다.
“달무리가 보이고 후덥지근한 것이 비가 많이 내릴 것 같은디요?”
곰소댁이 끼어들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근디 중앙기상대가 항상 맞추간디요? 틀릴 때도 많턴디” 곰소댁은 주위를 살피며 동의를 구하는 듯했다. 갑자기 번개가 치더니 '우르르 쾅쾅' 천둥소리가 들렸다. 영석은 심하게 배가 고프다고 생각했다.
"숙희 아빠! 오늘은 평상에서 자면 절대 안되겄소, 언능 신부님 보내드리고 내방으로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