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

by 서완석

얼마 전 나는 MBC TV에서 방영하는 제266회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는 뉴질랜드 출신 앤디가 3명의 형을 한국에 초대하여 전주를 찾은 장면이었다. 앤디는 세종대왕과 한국에 꽂혀 한국행을 선택했다고 하는데, 첫째 형 스티브는 유교문화에 푹 빠져 있는 ‘뉴질랜드 꼰대’이고, 둘째 형 리차드는 자동차에 빠져 있으며, 셋째 형 데이비드는 BTS에 빠져 있는 자칭 ‘뉴질랜드 아미’라고 한다.

4형제가 전주를 찾아 조선의 역사를 간직한 경기전을 관람하는 장면, 상다리가 휘어지는 한정식을 먹는 장면, 한복을 입고 한옥마을을 구경하는 장면, 달콤한 딸기빙수를 먹는 장면, 그리고 줄타기 공연 및 전주대사습놀이를 관람하는 장면 등 모든 한 장면 한 장면 모두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그들이 우리 판소리를 들으며 손가락을 까닥이고 발로 박자를 맞추는 장면에서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고,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 사람도 좋아할 수 있다는 진리를 체험하게 해준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장면은 팥빙수를 먹던 스티브가 한국어도 영어처럼 알파벳이 있느냐고 묻고, 이어서 리차드가 한국어는 몇 글자가 있느냐고 묻자 휴대폰을 검색한 막내 앤디가 기본 24자, 자음, 14개, 모음 10개라고 답하는 장면이다. 리차드가 “그것밖에 없다고?” 라며 놀라자 앤디는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등 한글의 모음을 정확하게 발음해준다. 휴대폰을 검색하던 데이비드가 영어 발음으로 표기된 한글을 찾아내고, 이를 스티브에게 보여주자 감탄을 하던 스티브는 가게 안에 적혀 있는 ‘반납대’를 가리키고, 앤디는 “여러 자음과 모음으로 결합된 글자”가 있으며, “보통 하나의 글자는 3-4개의 모음이나 자음으로 구성된다고 알려 준다. 그리고 스티브는 “아, 3-4개로 글자가 조합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 “난 지금까지 한덩어리라고 생각했거든”, “하나의 그림이 아니라 3-4개의 구성요소인 거네”, “알고 나니까 한글을 이해하기 훨씬 쉽다”, “생긴 건 엄청 어려워 보이는데”, 그러면서 “정말 이게 다야?”, “엄청 이해하기 쉬워졌어”, “내가 한글을 바라보는 방식을 아예 바꿔 놓았어”라고 말한다.

그런데 장면 중 압권은 스티브가 보고 있던 휴대폰을 건네받은 데이비드가 조용히 집중하다가 앤디를 부르며 ‘반납대’라고 쓰인 곳을 가리키며 “저기 첫 글자 있잖아”, “저거 ‘반’이야?” 라고 묻는다. 나는 그 장면에서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데이비드가 천천히 그리고 정확하게 “반납대?”라고 묻는 장면이었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삼아 쓰는 이의 수는 중국어, 스페인어, 벵갈어, 영어, 힌디어, 포르투갈어, 러시아어, 일본어, 중국어, 자바어 다음으로 프랑스 말 앞인 12위에 해당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문자이며,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음소문자라고 한다. 음소문자란 쉽게 말해서 낱낱의 글자가 하나의 소리를 낸다는 것으로 한글은 필기체, 소문자, 대문자도 없지만, 영어의 경우에는 대소문자 구별이 있고 글자 그대로 읽지도 않는다. 기본 자음 14자와 모음 10자, 그리고 겹자음과 모음을 합쳐 모두 40자로 구성된 한글은 먼저 한국어라는 말이 있고 나서 이를 바탕으로 인위적으로 만든 글자라는 점에서 세계 어느 언어와도 견줄 수 없는 과학적인 글자이다.

영국의 옥스퍼드 언어학 대학에서는 세계 모든 문자를 순위를 매겨놓고 있는데 자랑스럽게도 한글이 1위라고 한다. 세계의 수많은 역사가, 언어학자, 교수, 노벨상 수상자들이 한글을 극찬하고 한국학자들이 불참한 가운데 세계 언어학자들이 모인 프랑스의 학술대회에서 한국어를 세계 공통어로 썼으면 좋겠다는 토론이 있었으며, 영국의 언어학자 Geoffrey Sampson은 “한글이 한국인을 위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문자들 가운데 최고이든 아니든 간에, 한글은 의심할 여지없이 인류의 가장 위대한 지적 성취 중 하나로 꼽혀야 한다”고 했고, 또 다른 영국의 John Man이라는 역사 다큐멘터리 작가는 ‘한글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정작 TV를 보다 보면 국적 없는 단어, 맞춤법이 틀린 단어들이 무수하게 보인다. 특히 TV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은 가관이다. 편집자가 무식한 것인지 작가가 무식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도대체 자막 내용을 감시하고 거르는 장치는 없는지 묻고 싶다.

쟁반을 굳이 ‘오봉’이라고 말하는 배우는 무식해서 그런다고 치자. 그러나 “뗑깡(癲癎, てんかん)”이라는 용어가 원래 ‘간질’, ‘지랄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일본말인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말 중에 ‘생떼’라는 말이 있는데도 말이다. ‘다데기’, ‘나시’, ‘소보루’, ‘잉꼬’, ‘지리’ 등의 말도 일본말인지 아는 사람이 드물다. 일본어에는 50음도가 있지만 발음을 표기할 수 없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심코 일본식 발음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밧데리’, ‘타이루’, ‘샤쓰’ 등이 그렇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영어 등의 외래어는 그것이 외래어인지 금세 알 수 있지만, 일본어의 경우에는 마치 우리 말이나 우리의 발음인 것처럼 착각하고 산다는 것이다. ‘벤또’라는 말은 이제 사라진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민족의 얼이 담긴 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흔들려던 일제의 잔재가 너무나 많이 남아 있다. 한글은 우리 민족의 얼과 주체 의식이 담긴 이름이다. 지역마다 달랐던 한글 맞춤법 정리를 주도해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한 이윤재 선생은 “너희들은 틀림없이 독립을 보리라. 그러자면 지금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지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는 것일까?

이 글은 월간 수필문학 2022년 12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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