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1980년 언저리
제6화 경양식집 리자(Liza)(2)
“어! 수아야! 여기야”
영석은 경숙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입구를 쳐다보았다.
세련된 옷을 입은 짧은 머리의 여성이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서다 경숙을 바라보며 다가왔다. 영석은 어찌할 바를 몰라 엉덩이를 자리에서 들었다가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꾸벅 인사를 했다.
하늘거리는 옅은 푸른색 계열의 민소매 윗도리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하얀색 운동화를 신고 있는 여자도 영석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는 영석의 반대편 자리에 앉았다.
“서로 인사해, 우리 삼촌이야”
“아 네가 말했던 그 삼춘이시구나”
영석은 이미 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있었구나 하고 짐작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숙이가 삼촌이라고 부르는데 왜 저 여자는 나를 ‘삼춘’이라고 부르지? 하는 생각을 했다.
“안녕하세요? 삼춘, 저는 이수아라고 합니다.”
여자는 영석을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얼굴은 상당히 예쁜데, 짧은 머리 탓인지 보이시한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아, 네 저는 김영석이라고 합니다.”
영석은 이런 자리가 처음인지라 수아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손을 둘 곳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인데, 왜 10분이나 늦는 거니?”
경숙이가 가볍게 수아를 바라보며 눈을 흘겼다.
“야! 배고파, 어서 식사나 주문해.”
수아는 경숙이를 채근했다.
“여기 주문할게요.”
“어서 오세요, 메뉴는 고르셨나요?”
단정하게 빗어 넘긴 포마드 머리를 하고 하얀 와이셔츠와 검은 조끼, 그리고 나비넥타이를 맸는데, 허리에 두른 검은색 앞치마가 인상적인 남자 종업원이 테이블 옆으로 다가와 허리를 살짝 굽히며 낮지만 굵은 목소리로 물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메뉴를 보고 있던 경숙과 수아는 각각 동시에,
“저는 돈가스요.”
“저는 함박스테이크요.”
“그런데 삼촌은 뭘 먹을 거야?”
“네 저도 돈가스요.”
“그리고 커피 석 잔이요.”
“아냐, 나는 커피 안 마실래, 저녁에 잠을 못 잘까 봐서”
영석이 황급히 경숙이 말을 막고서 종업원에게 “커피는 두 잔만 주세요”
영석은 커피값까지는 생각을 못 했던 터라 당황했다. 그러나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어색하게 웃었다.
“네, 돈가스 두 개, 함박스테이크 하나, 커피 두 잔, 맞죠?"
"네 맞아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종업원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메모장에 모나미 볼펜으로 주문 내용을 적고서는 바로 옆에 있는 테이블의 손님들을 향해서 갔다. 옆 테이블에는 미군으로 보이는 짧은 머리의 백인 남성과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성이 손을 들어 종업원을 향해 손을 들고 있었다.
“Excuse me! Can we order?”
“Yes, sir. What would you like today?”
“I’ll have one beef cutlet. And… coffee, please.”
“Hamburg steak for me. With cola.”
종업원은 익숙하게 받아 적었다.
“One beef cutlet with coffee, and one Hamburg steak with cola. Is that correct?”
“Yeah, that’s right.”
“Thank you. I’ll bring it shortly.”
종업원은 다시 검은 앞치마를 고쳐 매만지며,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삼촌! 수아는 요기서 가까운 보광동에 살고 있어, 그리고 나와는 H여고 동창이야”
영석은 보광동이 어딘지 몰랐는데 경숙은 한남동 바로 옆이라고 했다.
“경숙이의 말에 의하면 삼춘은 재수를 하고 있다던데 힘들지 않으세요?”
수아가 불시에 훅 치고 들어왔다.
“아! 네, 그렇죠, 뭐”
“그런데 재수학원에 다니세요?”
갈수록 태산인 것이 요즘 학원비가 없어서 학원에 등록을 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설명해야 할 상황까지 왔기 때문이다.
“아 저기 학원에 다니지 않고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 같아서요”
영석은 솔직하게 학원 등록비가 없어서 등록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우리 삼촌 공부 잘해"
“삼촌 수아네는 아주 부자야, 그런데 우리 둘 다 대학에 가지 않기로 했어.”
경숙이가 집안 형편상 대학에 가지 않고 작은 회사에 취업하기로 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집이 부자라면서 수아가 왜 대학에 가지 않기로 했는지 매우 궁금했지만, 영석은 초면에 실례일 것 같아 묻지 않기로 했다.
“주문하신 돈가스 두 개, 함박스테이크 하나 나왔습니다. 커피는 식사 후에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창가에서 누가 담배를 피우는지 옅은 담배 연기와 함께 스테이크 냄새, 그리고 달콤한 커피 향이 뒤섞여 코끝을 간지럽히는데, 종업원이 붉은 체크무늬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에 음식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영석은 사용 방법이 틀리면 어쩌나 싶어 잔뜩 얼어붙은 표정으로 테이블 위 포크와 나이프만 힐끗힐끗 바라보고 있었다.
영석 앞에 가장 먼저 놓인 것은 동그란 하얀 접시에 담긴 뜨거운 크림수프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우윳빛 수프 위에는 파슬리 가루가 솔솔 뿌려져 있었다. 종업원은 수프 옆에 은색 스푼을 나란히 놓아주었다. 뒤이어 큼지막한 돈가스 두 개가 영석과 경숙 앞에 등장했다. 노릇하게 튀겨진 돈가스 위에는 데미그라스 소스가 먹음직스럽게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 옆에는 케첩 뿌린 양배추 샐러드와 새콤달콤한 마카로니 샐러드, 그리고 밥이 곁들여져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아 앞에 놓인 함박스테이크는 두툼한 고기 패티 위에 반숙 계란 프라이가 나른하게 올라앉아 있었고, 역시 데미그라스 소스가 풍성하게 뿌려져 있었다. 접시 가장자리에는 윤기 흐르는 완두콩과 노란 옥수수 콘이 색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음식들이 모두 세팅되자, 식탁 위는 마치 풍성한 만찬처럼 변했다. 고소한 돈가스 냄새, 달콤 짭짤한 함박스테이크 냄새, 옆자리에서 나는 갓 내린 커피 향이 뒤섞여 영석의 코를 자극했다.
“삼촌, 일단 수프부터 먹어봐.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영석은 조심스럽게 스푼을 들어 수프 한 모금을 떠먹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따뜻한 수프가 긴장했던 몸을 녹여주는 듯했다. 경숙과 수아는 능숙하게 나이프와 포크를 쥐고 돈가스와 함박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영석은 둘의 모습을 힐끗거리며 열심히 포크와 나이프를 놀려 엉성하게 썰린 고기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영석의 얼굴에 긴장이 풀리고 옅은 미소가 번졌다.
“여보게, 요즘 국제 정세 돌아가는 걸 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이야. 얼마 전 신문에서 키신저가 또 베이징에 다녀왔다는 기사를 봤는데, 자네도 보았는가?”
“그러니 말일세, 닉슨 대통령 때부터 물밑에서 움직이더니, 이제는 공공연한 일이 된 것 같아. 그 키신저라는 양반이 정말 대단한 책사야. 그 양반이 가는 곳마다 판이 바뀌니 말이야.”
“1971년에 UN에서 중공이 중국 대표권을 획득하고, 대만이 UN을 탈퇴해 버렸는데, 우리나라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적성 국가인 중공과는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중화민국과는 의리를 지켜야 해”
“암, 그렇고 말고, 일본은 이미 1972년에 중공과 수교하고 중화민국을 타이완으로 부르고 있지만 말이야.”
"일본 아이들은 자국에 이익만 된다면야 양잿물도 먹을 걸세"
“문제는 말이야, 그 판이 어떻게 바뀔지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거지. 화궈펑이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고 있지만, 덩샤오핑이 복권된 후로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실용주의 노선으로 급격히 선회하는 모양새인데, 그 끝이 어디일지….”
“그런데 과연 미국이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그냥 둘까?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일 수도 있고, 지미 카터 대통령이 인권을 외치고 있지만, 결국 외교는 힘의 논리 아니겠어?”
“덩샤오핑이 실권을 잡게 되면 중국은 완전히 다른 길을 갈 거야. 그들의 개방 정책이 성공한다면, 동북아시아 전체의 경제 지형이 바뀔 수도 있어. 우리도 그 흐름을 예의주시해야 할 걸세.”
“걱정되는 건 바로 그 부분이야. 미·중 관계 개선의 물결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말이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굳건해졌듯이, 미국과 중국의 밀월 관계가 깊어지면 한반도의 외교적 입지가 좁아질 수도 있지 않겠나? 안보 문제부터 경제 문제까지, 모든 것을 다시 고민해야 할 시기가 올지도 몰라.”
“맞는 말이야. 하지만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아야 하는 법이지. 그들의 관계 변화를 잘 활용하면, 우리에게 새로운 활로가 열릴 수도 있을 거야. 중요한 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린 것이겠지. 이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우리의 갈 길을 정확히 정해야 할 걸세.”
두 노신사의 대화는 1978년의 한반도가 마주한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영석은 경숙과 수아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말없이 돈가스를 먹으며 두 노신사의 대화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것이 숨 막히는 수아와의 긴장관계를 풀어줄 수 있는 일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 식사비는 천 원이 넘지 않아, 돈가스 두 개와 함박스테이크 한 개의 값이 육백 원, 그리고 커피 두 잔 값이 백 원으로 도합 칠백 원으로 삼백 원이 남았다.
“삼촌, 수아와 함께 좋은 시간 보내, 나 먼저 가볼게”
경숙이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난 후, 수아가 씩씩한 발걸음으로 앞장을 섰다.
“남산길이나 걸어 볼까요?”
"저 운동화 신은 것 보셨지요? 저는 비를 좋아하고 걷는 것을 좋아해요."
“네”
늦은 오후의 아직 식지 않은 볕이 이태원의 거리를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이국적인 팝송이 낡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미군 병사들의 캐주얼한 옷차림과 검은 머리 한국 젊은이들의 청청 패션이 뒤섞인 거리는 활기로 가득했다. 수아의 단발머리가 바람에 살랑거렸다. 두 사람은 말없이 천천히 길을 걸었다. 길가에는 작은 구멍가게들이 드문드문 있었고, 그 앞 평상에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앉아서, 부채질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래된 가로등 아래를 지나갈 때마다 그림자가 길어졌다 짧아지기를 반복했다. 아스팔트 위로 뜨거운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듯했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남산의 푸른 숲이 시야에 들어왔다. 도시의 소음은 점차 멀어지고, 매미 소리가 귓가를 채우기 시작했다.
“애프터 신청도 안 했는데 이렇게 같이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석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솔직히 말해도 되나요?”
수아는 거리낌이 없는 듯했다.
“그럼요”
“경숙이 얼굴이 있잖아요. 제가 그냥 가버리면 경숙이 체면이 말이 안 되잖아요”
영석의 얼굴이 화끈거리고 아까 먹은 돈가스가 체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셨군요.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왜 10분 늦게 왔는지 아세요?"
"왜죠?"
"여자의 자존심때문이죠"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삼춘 옷 입은 것 촌티 나는 것 아세요?”
영석은 급기야 어지러움까지 느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 집에 안 데려다주시고 갈 거예요?”
수아가 토라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당연히 모셔다드려야지요”
영석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시 경양식집 ‘리자’ 부근에 왔을 때 수아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저 이만 가볼게요. 오늘 즐거웠고, 고마웠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영석은 자신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느꼈다.
며칠 후, 도서관에서 돌아오니 영석에게 편지 한 통이 와 있었다.
발신인은 ‘이수아’로 되어 있었다.
“우리 집 주소를 어떻게 알았을까?” 영석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편지봉투를 뜯으니 한 장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 내용은 “경숙이에게 주소를 알아내서 편지를 씁니다.”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삼춘 질문있어요”라고 쓴 글 옆에 손을 번쩍 든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전혀 연락 안 하려던 수아는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는데, 나를 좋아할 것처럼 보이던 삼춘은 왜 아무런 연락도 없나요?......(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