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교

1978년-1980년 언저리

by 서완석


제7화 수아(2)

소포에는 수아의 주소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영석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소포를 뜯었다. 소포 안에는 ‘프로스펙스’ 운동화 한 켤레와 티셔츠 한 장, 그리고 카세트테이프 두 개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카세트테이프에는 수아가 익숙한 글씨체로 쓴 ‘MBC 제1회 대학가요제’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 ‘제1회 대학가요제’는 작년 9월 3일에 열렸고, ‘제2회 대학가요제’는 올해 10월 1일에 개최되기로 예정되어 있다. 영석은 글씨만 보고도 수아를 본 듯 반갑고 기뻤다.


비싼 운동화를 보니 영석은 뛸 듯이 기뻤지만, 한편으로 “이렇게 비싼 것을 어떻게?”하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편치 않았다. 그나마 프랑스 직수입품으로 한 켤레에 4, 5천 원씩 하는 ‘르까프’나 이보다 조금 비쌀 수도 있지만, 금강이나 화승이 독일 아디다스와 제휴하여 생산하는 덕분에 르까프와의 경쟁에서 가격 경쟁력을 가진 ‘아디다스’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과의 기술 제휴 없는 순수한 국내 브랜드로 금강에서 생산하는 ‘프로스펙스’는 2, 3천 원이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영석에게는 ‘프로스펙스’도 감히 신어 볼 엄두를 낼 수 없는 제품이지만 말이다.

굵은 ‘쉘토우(껍질 앞코)와 가죽 소재로 흰색 바탕에 파란색이나 검은색 3선(Three Stripes)이 들어간 아디다스 운동화와 슬림한 실루엣과 세련된 디자인으로 흰색 바탕에 빨간색과 파란색의 조합이 특징인 '마라톤 220' 모델의 르까프는 학생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영석은 '아디다스' 3선과 차별화하기 위한 2선, 갈매기 날개가 펴진 듯한 V자 형태의 '프로스펙스'도 좋았는데, 수아가 보내준 것이라서 그런지 '아디다스'나 '르까프'보다 훨씬 좋아 보이고, “국산 제품이잖아” 하는 자부심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번에 만났을 때 수아가 “삼춘은 나보다 발이 당연히 크겠지? 나는 230밀리를 신는데, 삼촌은 발 크기가 얼마야?”라고 물어서, “260밀리야”라고 대답했던 생각이 났다. 영석은 수아가 이런 일을 꾸미려고 발 크기를 물어본 것이구나 싶어 콧날이 시큰해졌다.

영석이 마지막으로 하얀색 티셔츠를 집어 올리자 안에서 메모지 한 장이 툭 떨어졌다.

“삼춘, 곧 체력장시험이 있잖아? 그래서 몇 가지 사 봤어. 꼭 특급받기를 기원할게.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대학가요제 곡들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서 보내니 내 생각이 나거나, 힘들 때는 이 노래들을 들으며 견뎌내야 해 알았지?, 아자 아자!”

영석은 “내 생각이 나거나”라는 문구를 읽고 또 읽으면서 학원 수학 선생님께서 항상 하시던 대로 “밑줄 쫙”을 외치고 싶었다. 벅찬 감동을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어서 밖으로 뛰어나가 하늘을 보며 크게 웃었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갑자기 우울해졌다. 체력장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100m 달리기, 제자리멀리뛰기, 던지기, 윗몸일으키기. 오래 달리기 등 5가지 종목 중에 영석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오래 달리기였다. 문교부는 1979학년도 대학입시부터 오래 달리기를 추가했는데, 영석은 폐결핵을 앓으며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던 터라 200미터 트랙을 다섯 바퀴나 돌아야 하는 것이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다. 두 바퀴까지는 어찌어찌 친구들을 따라가겠는데 세 바퀴째부터는 운동장에 그냥 드러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고, 다섯 바퀴를 다 돌고 나서 운동장에 쓰러져 가쁜 숨을 몰아쉴 때는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목구멍에서 타이어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고3 시절, 학교 당국은 방과 후에도 체육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체력장 연습을 시키도록 하였다. 공설운동장에서 시내 전체 남녀 고등학교 학생들이 모여서 펼치는 교련대회 연습도 죽을 맛인데,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상태가 좋을 리 없는 영석에게 체력장 연습은 지옥 그 자체였다.


체력장 점수는 80점 이상: 특급, 70–79점: 1급, 60–69점: 2급, 50–59점: 3급, 40–49점: 4급, 39점 이하: 5급 등으로 환산했는데, 영석은 연습할 때마다 항상 5급이었다. 그리고 특급은 20점 만점, 1급은 19점, 2급은 18점, 3급은 17점, 4급은 16점, 5급은 15점이니,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0.1점을 가지고 다투는데, 5점이나 깎인다는 것은 수험생에게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영석은 고등학교 3학년 때 키가 173센티미터, 몸무게가 48킬로그램이니 그냥 책가방이 말라깽이를 끌고 다니는 형국이었다. 오죽하면 영석이 “바지가 뜯어져도 좋으니 살 좀 쪄봤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고 다녔을까, 그나마 올해는 좀 나아져서 52킬로그램 정도로 살이 붙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냥 시체 하나가 걸어 다닌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1979학년도부터 체력장은 절대평가에서 상대평가로 바뀌었다. 과거 절대평가의 경우, 정해진 기준선 안에만 들어오면 만점을 맞을 수 있으므로, 체력이 약해도 연습하면 만점이 가능했으나, 1979학년도에는 상대평가로 바뀌어 100명 중 기록 순위에 따라 점수를 배정하므로 체력이 약한 학생은 무조건 하위권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었다. 따라서 언론에서도 “체력장 성적 때문에 허약 체질 학생들이 피해를 본다”라는 지적을 계속하고 있었다.


영석은 주소지를 서울로 옮겼기 때문에, 이태원 부근에 있는 ‘중경고등학교’에서 체력장을 치러야 한다. 영석에게는 낯선 이름의 학교인데,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1967년에 육군 방첩부대장이었던 김재규가 설립했고, 군인 자녀들을 위한 사립고등학교로서 “전교생 장학생‘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군인 자녀는 어떤 학교에 다니든 학비가 면제일 텐데, "전교생 장학생"이란 말이 성립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보기 드문 남녀공학이라는 점이 참 흥미로웠다. 또한 체력장시험 원서접수를 하고 장소 확인차 찾아간 학교 건너편에 육군 아파트가 있고, 주변에서 헬리콥터가 오르내리는 광경도 인상 깊었다. 여하튼 현재 김재규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장이니 학교가 많은 특혜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영석은 수아가 보낸 선물이 너무 감사하고 기뻤지만, 한편으로 체력장에서 만점을 받아야 한다는 중압감이 들어 우울해졌다. 그래서 저녁에 오목교 주변을 뛰면서 체력을 늘리기로 했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몸이 따라주지 않음을 느꼈다. 도서관에서 돌아오면 기진맥진해서 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면 수아가 보내준 ’MBC 대학가요제‘ 노래를 들으며 피로를 풀었다. 누나도 역시 그 노래들을 매우 좋아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런 대회에 나가 노래를 부를 자격을 가진 대학생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카세트테이프 제1집 A면에는, 샌드 페블즈의 나 어떡해(대상)/소리모아의 저녁 무렵(동상), 김경애의 회심/조해옥의 다시 핀 목련꽃/홍성모의 제비, B면에는, 박선희의 하늘(금상)/함영주 외 5인 당신은 모르실 거야(은상)/서울대 트리오의 젊은 연인들(동상)/조선근, 조후근의 꿈나라/ 김희숙의 나의 어머니 등이 수록되어 있고, 제2집 A면에는, 이명우의 가시리(은상)/박찬, 조근익의 권투선수/이기숙, 이영옥의 하얀 꿈/박형철의 작은 세상/한명은의 세노야, B면에는, 유태왕의 우연/김종민의 방랑자/함중아의 나에게도 사랑이/개구리와 두꺼비의 하얀 파도/김종호와 북두칠성의 밤하늘 별이 빛나고 가 수록되어 있었다.

모두 주옥같은 노래들이었지만, 영석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대상을 받은 샌드 페블즈의 '나 어떡해'였다.

나 어떡해 너 갑자기 떠나면/나는 무얼 어찌해야 하나/나 어떡해 널 두고 떠나면/나는 무얼 어찌해야 하나/돌아서는 저 햇살을 보며/울지는 말아 줘/가슴 아프지 않게/슬퍼도 웃어줘/나 어떡해 너 갑자기 떠나면/나는 무얼 어찌해야 하나/나 어떡해 널 두고 떠나면/나는 무얼 어찌해야 하나/나는 어둠 속에 묻혀/너를 잊어버리네/나는 어둠 속에 묻혀/나를 잊어버리네

이별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영석이 자신의 처지에서 본다면 아직 관계가 진전된 바는 거의 없으나, 수아가 갑자기 떠난다고 하면 어쩌지?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고, 꼭 연인관계가 아니더라도 부모나 친구 등 소중한 관계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상실의 두려움을 보편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으며, 멜로디와 연주가 서정적이면서도 격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나가 청계천에서 사 온 카세트 라디오를 이용해 듣고 또 들었다.


영석은 '나 어떡해'라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사랑은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지만, 동시에 언젠가 그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깊은 불안감을 동반하는 것이고, '나 어떡해'라는 외침은 바로 그 불안과 마주한 인간의 절망적인 감정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즉,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부터 이미 이별이라는 상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고, 영석 자신 역시 지금 사랑의 양면성, 즉 창조와 상실,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 문학반을 지도하셨던 국어 선생님은 유독 사르트르의 이야기를 많이 하셨는데, 사르트르는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하는 자유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동시에 이 자유 때문에 끝없는 불안(anxiety)에 직면한다.”라고 주장했다고 하셨다. 다시 말해, 사르트르의 철학에서 ‘본질(Essence)’은 어떤 존재를 규정하고 정의하는 특성들의 총체를 의미하는데, 예를 들어, 칼의 본질은 '자르는 도구'이고, 의자의 본질은 ‘앉는 도구’인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사르트르가 인간에게는 이러한 본질이 미리 주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면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유명한 명제가 바로 그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이 없는 대신 자유로운 선택과 행동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 나가는 존재라고도 하셨다.


“인간의 본질은 고정된 것이 아니야, 너희들의 본질은 너희가 살아가면서 만들어 나가는 결과물인 거야”, “너희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따라 너희들의 본질이 결정되는 거야, 그리고 그러한 무한한 자유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사르트르가 말하는 ‘불안’이다. 알겠냐?”


영석은 "나 어떡해 너 갑자기 떠나면"이라는 가사에 수아를 집어넣어 보고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갑자기 다가온 수아라는 존재에게 조금씩 사랑을 느끼게 되었는데, 수아는 자신의 일부가 아니고 자신만큼이나 자유로운 존재이므로 수아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본질을 만들어 갈 것이며, 그녀는 언제나 자신을 떠날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 이것이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불안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자신은 수아가 자신의 곁에 머무르기를 바랄 뿐이며, 수아의 선택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노래는 영석이 자신의 선택과 노력이 수아의 자유로운 선택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외침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자신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는 당위성과 수아가 떠나면 자신의 세계는 어떻게 될까 라는 불안감이 영석의 내면에서 맹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깊이 빠져 있다 보니 갑자기 수아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오메, 학생 도서관 댕겨왔는 개비네, 학생 안에 있는가?”

“왼 종일 굶어서 배창시가 등거죽에 찰싹 붙어버린 건 아니겄제?”

“여그 강냉이 쫌 삶아왔응게 한번 잡솨봐”

곰소댁의 목소리에 상념에 잠겨 있던 영석이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아따 뭘 그렇게 놀란 당가? 몰래 횟대 위에 앉은 달구새끼 서리하다가 주인 영감한테 뒷덜미 잡힌 놈 맹키로”

“아직 누나는 안 온 거여?”

“네, 너무 감사합니다.”

“방이 눅눅헐 거 같어서 내가 일부러 우리 연탄 두 장 갖다가 부엌에 연탄 피워 놨응게, 누나 오거든 말허고 방 따땃허게 허고 자. 처서도 지나고 곧 백로 지나면 추석 아닌가? 밤공기가 차니 감기 조심혀, 알았제?”

“ 네 아주머니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뭔 놈의 얼어 죽을 감사, 없는 사람이 없는 사람 맘 안다고 안 허등가?”

아침저녁으로 찬물로 씻기가 조금은 꺼려지는 데 방바닥이 따뜻해지면 잠이 잘 올 것같은 생각이 들어 영석은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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