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5 멈추게 되는 날

매주 목요일 아침마다 생각나는 글을 씁니다

by 이재민


요즘 나는 해야 할 일을 자주 잊는다


머릿속 휴지통을 누군가 말끔히 비워버린 것처럼,
무엇을 하려 했는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핸드폰을 꺼내며
‘돈 정리를 해야지’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새 카카오톡을 하고 있고,
갑자기 지난 사진들을 들춰보거나
SNS를 켜서 철지난 게시글을 보며 혼자 킬킬거린다


10분쯤 지나서야 문득 떠오른다
“아, 내가 돈을 보내려고 했었지.”


부랴부랴 다시 핸드폰을 연다


방금 전에도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 같고,
그 다음에 해야 할 일도 있었던 것 같고,
오늘, 이번 주, 다음 주에 꼭 해야 할 일들이
분명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은데
끝내 잡히지 않는다


내 머리와의 끝없는 싸움 속에서
나는 결국 나에게 지고,
‘다음’을 기약하며 멈춰 선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몸을 한껏 부풀리고,
심장 가득 공기를 채워
겹겹이 쌓아 올리면
이상하게도 머리 쪽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든다


이건 일종의 나만의 트리거다


2년 전, 불안이 심해진 이후
내게 남은 나쁜 습관은
어떤 일에도 오래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해야 할 일들을 바닥에 흩뿌려 놓고 그 위를 뒹굴다가
어느 순간 실마리 하나를 발견하면, 그제야 천천히 실타래를 감듯
기억을 되감아 올리는 방식 놓치는 부분은 끝도 없다


그래서 나만의 트리거, 일종의 움직이기 위한 방아쇠를 만들었다


이 호흡을 세 번쯤 반복하면
멈춰 있던 내 시계가
아주 조금 다시 움직인다


머리에 피가 도는 기분이 들고,
열 개 중 단 하나라도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다는 감각이 남는다

그래도 해냈다는 무언가의 쾌감이 날 살아가게 하는 것 같기도

꽤 괜찮은 인간이라 느끼게 하는것 같기도


*트리거(trigger): 방아쇠라는 뜻, 어떤 행동이나 상태로 들어가기 위한 신호를 의미하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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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진 머릿속이나 생활 또는 아무것도 없는 하루에 너무 낙담하거나 부족하다 생각하지 않는 하루가 되길

바쁘고 안 바쁘고의 문제보다 오늘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른 아침 에세이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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