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달을 바라보는 6펜스의 인간들이 앓는 병
『달과 6펜스』를 곱씹는 이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6펜스의 세계에 발을 딛고 있다. 아니, 어쩌면 늘 생각이 거기에 닿아 있는 글쓰기라는 고통스러운 몰입 속에서, 엄청난 집중과 에너지를 쏟아붓고도 허탈할 때가 많은 이 ‘미친 짓’이 과연 무엇인지 되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걷다가도, 잠자리에 들 때도 글이 떠나지 않는다. 생계를 위해 6펜스를 긁어모으며, 단 한 번도 하늘의 달을 포기하지 못한 채 살아온 지난한 세월이다.
작가이면서 출판사 편집자로 40년을 보내면서 수많은 원고를 다듬어 작가의 언어를 세상에 내보내는 일을 해왔다.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작가들이 육필 원고를 우편으로 보내거나 직접 들고 출판사를 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투고 환경이 훨씬 편해졌고, 온라인으로 한 번에 수많은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 그만큼 투고 원고가 폭증했고, 편집자로서 그 모든 것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일 중의 하나였다.그 과정에서 자신이 혼신을 다해 쓴 원고가 책으로 출판되기를 염원하는 수많은 글쓴이의 얼굴을 보았다. 절박함과 기대, 그리고 거절의 불안이 교차하는 얼굴들. 그 위로 나 자신도 수없이 느꼈던 좌절의 그림자가 겹쳐 보이곤 했다.
그 절박한 염원과 고통의 교차점에서, 나는 오래전부터 그것을 ‘문병(文病)’이라 불러왔다. 이 아이러니는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다. ‘배고픈 직업’임을 알면서도 글을 놓지 못하는 이들, 영혼이 글쓰기를 명령한 이들의 보편적 운명이다. 문학 예술인에게는 대개 물질에 초연한 미덕이 덧씌워지곤 한다. 고결한 혼을 위해 가난을 선택한 순교자처럼 포장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유복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문학을 탐구하기도 하는데, 참으로 부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에게 가난은 선택이 아니라 절박한 삶의 결과이다. 안정된 수입으로 글쓰기에 전념하는 문인은 극소수이며, 대다수는 현실의 끈 위에서 위태롭게 버티며 존재를 이어간다. 그들의 세계는 인풋과 아웃풋이 비례하지 않는 불합리로 점철되어 있다. 한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쏟아붓는 시간, 고독, 정신의 에너지는 상상을 초월하지만, 세상의 무관심은 그 가치를 깎아내려 한순간의 ‘허탈함’으로 돌려놓기도 한다.
찰스 부코스키는 그 냉혹한 진실을 이렇게 적었다.
피골이 상접해 어깨뼈로 빵도 자를
지경인데 자를 빵이
있어야 말이지…
그 와중에도
종이에 끄적이고
또 끄적였다.
이 시구는 내 심장을 날카롭게 찔렀다. 그는 쓰지 않으면 죽는 사람이었다. 나 역시 그 끄적임 속에서 살아남았다. 부코스키의 뼈마디 같은 언어는 글이 생존의 방식이자 절망을 견디는 해독제임을 일깨운다. 세상의 부조리가 심신을 괴롭힐 때, 한없이 무력해진다. 그럴 때마다 니체의 말을 떠올린다.
“나를 죽이지 않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그의 고뇌가 문장으로 승화되었듯, 고통은 글을 통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은 이렇게 물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그 물음은 땀방울 속에서 건져 올려진 글의 값진 힘을 증명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지만, 성공은 실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타고난 재능이 뛰어나거나 ‘시절 인연’이 맞아떨어진 일부는 세상의 조명을 받지만, 나머지 80% 정도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태운다. 그들은 부업을 전전하며 꿈과 생계의 틈에서 흔들린다. 내가 알고 지냈던 한 작가는 원고료 몇 푼을 받으려 출판사 사장과 다투다 결국 펜을 내려놓았다. 또 다른 이는 새벽녘까지 글을 쓰고 낮에는 택배 상하차로 생계를 잇는다. 그는 원고를 붙잡으며 자신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이 고독한 80%가 예술 세계의 근간이며, 가장 처절한 희생자들이다. 예술은 ‘지옥의 닫힌 문’을 두드리는 행위이다. 그 문 앞에서 어떤 이는 침묵하고, 어떤 이는 다시 펜을 든다.
많은 사람이 ‘무병(巫病)’을 알지만 ‘문병(文病)’은 모른다. 무당이 되기를 거부하는 이가 고약하기 짝이 없는 신병을 앓듯, 창작을 갈망하는 영혼을 억누를 때 내면의 피는 끓어 넘치고 혼돈이 발작처럼 찾아온다. 젊은 시절, 깊은 산속 암자에서 만난 한 고시생의 이야기가 내 뇌리 속에 ‘문병’이란 생소한 단어를 조각하듯이 깊이 새겼다. 그는 부모의 뜻으로 고시 공부를 했지만, 그의 영혼은 글쓰기를 갈망했다. 그 갈망을 억누를 때마다 분노와 불안이 발작처럼 터져 나왔다. 결국 그러한 상황이 그 자신의 모든 운명을 삼켜버렸다. 풍문으로 들리는 말은, 고시 합격도 못 하고 폐인이 되어 떠돌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글이 막히면 영혼이 썩기 시작한다. 나는 그것을 문병이라 부른다. 글쓰기는 취미가 아니라 생존의 호흡이며, 문병으로부터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길이다.
예술가의 고뇌는 두 질문으로 수렴된다. “나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먹고 사는가?”
그 사이에서 우리는 흔들린다. 물질에 초연한 척, 정신적 풍요로 현실을 부정하려 애쓴다. 나도 이따금 입에 담는 “소유의 삶보다 존재의 삶이 더 값지다”라는 말은 다분히 철학적이고 아름답지만, 때로는 절망을 덮기 위한 주문이다. 새벽의 정적 속에서 그 주문은 무력해진다. 가난은 어깨를 짓누르고, 생계의 공포가 가슴을 찌른다. 그럼에도 펜을 놓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본능이기 때문이다. 물에 빠진 자에게 헤엄의 이유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헤엄은 곧 생존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6펜스를 긁어모으며 달을 바라본다. 내가 새파랗게 젊었던 시절,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공사판에서 일하다 심하게 몸을 다쳐 방구석에서 오열하던 무명 소설가를 기억한다. 그는 원고를 붙잡으며 자신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재능을 피우려 애쓴 수많은 사람을 기억한다. 지옥의 문 앞에서 글을 쓰는 모든 이는 이미 그 자체로 예술의 증거이자 인간의 존엄이다. 비록 지금은 빛을 보지 못하고 묻히더라도, 그 지옥을 지나며 남긴 흔적은 누군가에게 인생을 건네는 귀한 지도가 되리라 믿는다.
문병은 예술가만의 병이 아니다. 내면의 목소리를 억누를 때마다 우리는 모두 문병을 앓는다. 오늘도 나는 깊은 밤 불빛 아래 펜을 든다. 문병의 고통 속에서, 영혼의 불꽃으로 존재를 새기는 모든 문학 예술인에게 깊은 경의와 연민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