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속의 세 마리 쥐

_아는 힘과 뛰는 힘, 그리고 말의

by 축성여석

브런치에 이 연재를 시작할 때만 해도, 편집자 지망생 후배와 독자들에게 편집이라는 직업과 글쓰기의 세계를 조금 더 가까이 전해보고 싶었다. 시작할 때의 다짐은 단순했다. 정말 글다운 글, 내가 꼭 남기고 싶은 글을 한 편 한 편 수를 놓듯 직조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음이 시들해지고, 몸이 게을러지고, 글은 어느새 처음 품었던 열기보다 형식 쪽으로 기울어 간 것이 몇 주째 이어지고 있다.
이번 글도 그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스스로 잘 알기에, 제기랄, 이런 고백부터 들이밀게 되었다. 이렇듯 솔직한 고백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내 글을 읽어 주시는 독자분들의 너른 이해를 구한다.
그래도 이렇게 작은 조각들이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그중에서 한 권의 책을 엮을 만큼의 무게를 가진 글들이 나올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나는 문득, 왜 이렇게 글이 버겁게만 느껴지기 시작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편집자로 살아온 세월 동안 글을 만들고 다듬는 일은 내게 가장 자연스러운 호흡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 호흡이 거칠어지고, 문장 하나를 넘기기도 쉽지 않다. 그러다 머릿속에 늘 살아 있던 ‘세 마리 쥐’가 다시 떠올랐다.

평생 글과 책을 다루며 나를 움직여온 세 가지 힘—
아는 힘, 뛰는 힘, 그리고 말의 힘.
이 셋이 지금 제각각 따로 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이 흐트러지는 이유도, 몸이 지치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오래전부터 내 의식 한켠을 차지하고 살았던 그 세 존재를 꺼내어 다시 바라보려 한다.
그들은 나를 번아웃 직전에서 붙들어 준 적도 있고, 반대로 정신없이 몰아붙이기도 했던, 참으로 불편하지만 떼어낼 수 없는 동료들이다.


뇌 속의 세 마리 쥐


나는 인간이 세 가지 능력을 잃는 순간, 바로 붕괴한다고 믿는다.
아는 능력, 움직이는 능력, 말하는 능력.
그리고 이 셋은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서 세 마리의 동물로 살아왔다.

그들은 반려동물이 아니다. 의식의 틈새, 뇌의 어두운 복도에서 야생의 본능으로 꿈틀거리는 기생적 존재들이다.


날리쥐(Knowledge) – 아는 것의 공포

날리쥐는 책을 먹으며 자란다.

책장을 갉아먹어 삼킬 때마다 조금 더 현명해지지만, 동시에 조금 더 두려워진다. 지식은 빛처럼 보이지만, 실은 ‘위험을 계산하는 기계’다. 많이 알수록 계산은 정밀해지고, 그 정밀함이 인간의 발목을 붙잡는다.

2025년의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기후 상승 곡선의 말미가 어디로 향하는지, 전쟁 지수와 실업률 시뮬레이션이 어떤 결론을 예고하는지 등등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습득하는 지식이 참 많다.
그러나 정보를 품고도 움직이지 못한다. 날리쥐가 비대해지고, 지식이 파국을 예감하는 감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예감은 언제나 몸을 얼린다.


컬리쥐(Courage) – 뛰는 것의 위험

컬리쥐는 반대로, 알기 전에 뛴다.

뛰고 나서야 그것이 다리인지 낭떠러지인지 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공포와 함께하는 도약’을 그는 태생적으로 몸으로 산다.

문제는 공포가 너무 늦게 도착한다는 것이다. 추락이 이미 시작된 뒤에야 공포가 뒤늦게 얼굴을 내민다. SNS에서 혁명을 외치는 아이들, 전 재산을 코인에 넣는 젊은 창업자들, 뛰는 데 익숙해져 자해와 비약의 경계를 잃어버린 세대들.

모두가 컬리쥐의 자손이다.
용기는 아름답지만, 방향을 잃는 순간 재앙의 추진력이 된다.


랭귀쥐(Language) – 의미를 잇는 칼

랭귀쥐는 조용하다.
긴 시간을 들여 문장을 벼리고, 정말 필요한 순간에만 칼집을 연다. 언어는 흔히 다리로 비유되지만, 랭귀쥐가 만든 문장은 단순한 다리가 아니다. 지식과 용기, 두 동물의 힘을 교차시켜 하나의 현실을 발화시키는 정밀한 도구이자, 때로는 세계를 전환시키는 기폭제다. 지식이 아무리 방대해도 말로 구조화되지 않으면 의미가 되지 않는다. 용기가 아무리 뜨거워도 말로 표적화되지 않으면 방향을 잃는다. 언어는 둘을 연결하고, 제어하고, 폭발시킨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고 했다. 나는 한 문장을 더 붙인다. 언어의 빈곤은 세계의 빈혈이다. 2025년의 우리는 무한한 정보를 알지만, 그 정보를 담을 단어는 빠르게 사라진다. 감정은 몇 개의 유행 라벨로 축소되고, 사람들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진단’한다. 언어가 축소될수록 지식은 차갑게 고립되고, 용기가 아무리 뜨거워도 말로 표적화되지 않으면 추진력을 잃는다.


날리쥐만 비대해지면 계산된 절망 속에서 움직임이 멈춘다.
컬리쥐만 강해지면 멸망을 향해 뛰어드는 가속기가 된다.
랭귀쥐만 발달하면 말로 구조를 흔드는 조작자가 된다.

셋이 따로 놀기 시작하면, 인간은 세 개의 조각난 본능으로 분열하고 세계는 그 틈새로 파고든다.


진짜 변화는 감동에서가 아니라, 세 동물이 동시에 작동하는 순간에서 시작된다.

날리쥐는 속삭인다.
“이 길은 73% 확률로 실패한다.”

컬리쥐는 대답한다.
“남은 27%에 내 생을 건다.”

랭귀쥐는 마지막 문장을 적는다.
“그 27%를 언어로 증명하고, 의미로 만든다.”

사람들이 그 문장을 믿기 시작하면, 행동이 모이고, 돈이 흐르고, 새로운 계산과 새로운 도약이 이어진다. 세계는 이렇게 미세한 언어의 진동으로 움직인다.


인간이라는 하나의 몸

세 마리 동물은 귀엽지 않다. 서로를 물어뜯고, 서로를 잡아먹고, 불시에 우리를 배신한다.

그럼에도 셋이 한 몸에 들어 있는 한, 우리는 인간이라는 구조를 유지할 수 있다.

지식은 너를 멈추게 하고, 용기는 너를 추락시키고, 언어는 너를 살아 있게 한다.
셋 중 하나라도 죽으면, 너라는 존재도 함께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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