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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우 Jul 16. 2024

함께 가자, 우리!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을 읽고

   체코의 국민작가 카렐 차페크가 1934년에 펴낸 소설‘평범한 인생’을 읽었다.           

 짧게 요약하면 ‘정년퇴직한 평범한 철도 공무원이 심장병이 악화하자, 죽음의 문턱에서 남긴 삶의 기록이다.’ 개인의 삶 속에 숨겨진 다양한 자아들을 조명하며 정체성의 진실을 자서전 형식의 액자식 구성으로 탐구하는 내용이다. 숨겨진 자아를 발견해 가는 이야기를 통해 억압, 통제된 인간 본성, 욕망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고 그것이 어쩌면 인간 본연의 보편적 정서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각자가 어떤 다른 가능성을 살기 때문에 우리는 똑같은 사람들이다. 네가 누구든 너는 나의 무수히 많은 자아이다. 네가 악인이든 선인이든, 그건 내 속에서도 있는 거야. 내가 너를 미워하더라도 난 네가 나의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는다. 나는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리라. 그의 멍에를 느끼고 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그에게 닥친 부당함에 대해 함께 괴로워하리라. 내가 그와 가까워지면 질수록 나는 더 많은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239쪽          

 위의 인용을 비롯해 책의 후반 많은 부분에 인간 개인 내면에 깃든 여러 욕망과 억압이 타인의 그것과 거울처럼 닮아있고 나의 총체적 모습은 결국 지나온 조상과 형제들의 유전적 형질에 다름 아니라고도 말한다. “개인은 타자(他者, Other)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2-1981) 욕망 이론’과도 맞아떨어진다. 라캉의 말처럼 욕망의 척도가 타자이기에 오늘날 내 이웃의 평범하고 일반적인 시기와 질투 혹은 말속의 허망들이 이해되는 순간이다. 사회가 공유하는 욕망의 가치에 휘둘려 욕망 자체를 욕망하는 어리석은 자아로 보이기도 한다.      

 

  새로운 자아들이 하나둘씩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영웅적인 자아, 낭만적인 자아, 우울증 환자 같은 자아 등등. 그리고 마침내 ‘나’란 존재는 어쩌면 내가 관계 맺어 온 모든 사람, 나의 조상의 조상의 조상, 심지어 내가 관계 맺을 가능성을 갖고 있었던 모든 것의 총합일지도 모른다는 혼란에 사로잡힌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이 목소리는 인간 내면이 지닌 여러 페르소나를 보여주면서 한 사람이란 객관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모습으로 정의될 수 없음을 알려준다. 그의 삶이 복잡해질수록 우리는 그에게 더 공감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가 지닌 욕망이 '특별한' 인물이 지닌 이해 불가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라면 작든 크든 품고 있을 본성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된다. 자기 안의 타인도 이해하게 된다는 함의를 담아내며, 서로의 차이점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형제애를 실천하는 것을 지향하는 차페크 문학의 본질인 휴머니즘의 정수를 보여준다.      

 

  책을 읽고 작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다양한 자료 검색을 해봤다. 작가의 삶은 19세기에서 20세기를 통과하는 폭풍 같은 변화를 남다른 뚜렷한 신념과 용기를 지니고 헤쳐 나갔다. 그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래서 존경심으로, 팬으로 더 가까이 가게 되었다. 계산기를 두드려 보니 올해는 그가 세상을 뜬 지 정확히 86년째이다. 지금에 와서는 일반 사람의 생애사 연구, 평범한 사람들의 자서전 쓰기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고 적극 장려한다고 들었다. 한 개인 속에 여러 개의 자아가 있고 시간, 공간 속에 경험으로 녹아내어 몇 가지 뚜렷한 개인사로, 욕망과 억압의 부피를 뚫고 드러나는 점은 상식적인 인간 본성으로 여겨지고 있다. 새삼, 소설의 주인공처럼 퇴임 후 자서전 비슷한 단편적 글쓰기로 시간을 보내는 내게 더 살갑게 다가온다. 그리하여 고생스럽게 반복되는 퇴고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치고 있다. 내 안의 자아 찾기에 현명하게 반응하고 깨달아,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진실한 글쓰기와 성찰을 해야 함이다.     

 

〈“인생은 아이의 상태에서 서서히, 그리고 눈에 띄지 않게 남자가 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갑자기 아이에게서 놀랍게도 완성되고 성숙한 인간의 면모가 나타난다. 그러한 면모는 서로 들어맞지도 조직적이지도 않으며, 아이의 내면에서 연관성이나 논리성 없이 상충되어 거의 광기처럼 나타난다. 다행히도 우리 어른들은 이 상태를 사려 깊게 관조하는 데 익숙하며, 인생을 대단히 심각하게 여기기 시작하는 소년들에게 그 시기는 지나가는 것이라며 위안을 준다.”〉 57쪽     

 위 문단은 다름 아닌 사춘기 청소년의 변화를 대하는 아이와 어른의 상식적 태도를   작가의 해석으로 지적하고 있음이다. 오늘날에 와서 그런 태도는 거의 상식이 되었다. 그 점은 며칠 전 우리 집 둘째와 관람한 영화 ‘인사이드 아웃 2’의 이야기 구조로도 설명할 수 있겠다. 몸과 마음의 성장기에 교통사고처럼 예고 없이 나타나는 질풍노도의 감정의 폭발과 통합을 곧 사춘기 성장통으로 보여준다. 가벼운 위로나 우스갯소리로 격의 없는 사이에서 종종 인용되는 “ 이 또한 지나가리라”가 떠오르기도 한다.          


〈삶에 대한 해석과 예찬을 다루고 있는 차페크 소설‘평범한 인생’은 ‘우리’라는 범주 안에서 서로를 포용할 때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라는 평범함의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는 삶의 오마주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257쪽          

  옮긴이의 해석대로 소설 ‘평범한 인생’은 보통 사람들의 특별하고 고귀한 점 혹은 감추어진 욕망과 억압되어 있던 상처의 기억을 더듬으며 8가지, 아니 그 이상의 새로운 자아 찾기로 보여준다. 어리고, 어두운, 혹은 깊거나 얇은 또는 불편하고 불행한, 아니면 허약하거나 위태로운 경험의 시공간, 내면 깊숙이 기억의 우물에서 현재의 두레박으로 다시 퍼 올린 자아는 '평범한 주인공'의 평범하지 않음, 이다. 이렇듯 내면에서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주인공의 자각은 자기 극복과 초월의 의지로 읽힌다. 자기 안에서 다양한 '우리'를 포용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카렐 차페크가 말하는 평범한 인생의 비밀은 이타적인 사랑과 연대에 있는 게 아닐까. 그것이 우리 삶을 평범하면서도 비범하게,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는 진실한 삶에 다가가게 해 준다고 속삭이는 것 같다. 이 점은 박완서의 수필 ‘보통으로 살자!’를 읽고 쓴 내 글 ‘보통 살기의 어려움’에 중복된다. 100년 전쯤에 차페크는 보통 사람의 자서전을 소설로 쓰면서 ‘보통 살기의 어려움’을 감추어진 욕망과 억압을 통해 숨겨진 자아 찾기로 보여 주고 있다.          


〈나는 이기주의자들을 배척할 것인데, 내가 이기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아픈 사람을 돌볼 것인데, 내가 병자이기 때문이다. 성당 문가에 서 있는 거지를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인데, 내가 그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의 나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수록 나 자신의 삶은 더욱 완성되리라. 〉239쪽          

섬세한 것이 위대하다고 한다. 내 안의 가장 작은 우주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우리’라는 주변을 이해하는 노력일 것이다. 가장 내밀하고 개인적인 섬세한 자아를 발견하고 이해하는 일이 타인을 이해하고 인간 보편의 삶에 다가감이다. 카렐 차페크가 말하는 평범한 인생의 비밀은 이타적인 사랑과 연대에 있는 게 아닐까. 그것이 우리 삶을 평범하면서도 비범하게,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는 진실한 삶에 다가가게 해 준다고 속삭이는 것 같다. 박완서 작가의 ‘보통으로 살자!’와 연계되는 지점이다.           

 

〈국제선이 아니라 어느 역에나 멈춰 서는 아주 평범한 완행열차가, 평범한 기차라고 무한을 향해 달리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칙칙폭폭......, 역무원은 조그만 망치로 선로를 두드리고 플랫폼에는 신호수의 등불이 흔들거린다. 역장은 시계를 본다. 이제 시간이 되었군. 객차의 문이 철커덕 잠기고 모두들 거수경례를 한다. 출발, 기차는 전철기를 지나 어둠 속으로 무한궤도 위를 달리기 시작한다. 잠깐 기다려. 저기에는 사람들이 가득 탔다. 마르티네크 아저씨가 앉아있고, 주정뱅이 대위가 구석에서 곤히 잠들어 있다. 얼굴이 검은 소녀가 창문에 코를 들이밀며 혀를 쭉 내민다. 마지막 객차의 짐칸에서 선로 제동수가 깃발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기다려, 나도 함께 가겠네!〉242쪽           

소설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기차는 새로운 기술적 혁신과 현대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근대기 문화 전반에서 큰 의미를 지녔습니다. 속도와 이동의 새로운 수단으로써 사람들의 삶에 깊은 변화를 불러왔고, 개인의 경험에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기차와 기차역은 시대적 변화와 사회적 진보를 상징하는 중요한 상징물로 기능하며, 서로 다른 사회적 계층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연결하는 장소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작가 카렐 차페크는 파시즘의 위협 속에서도 상대주의적이고 절대적인 인간성에 대한 신념과 휴머니즘을 창조적 문학세계를 통해 표현했습니다. 그의 문학적 업적은 마치 기차의 희망찬 기적 소리처럼 기억됩니다.      

“나도 함께 가겠네!”     

지금의 목소리로 바꾸면 이쯤 될까요?     

“함께 가자, 우리!”    



 


윗글과 연관된 작품을 찾다가 비교적 비슷한 감상을 갖게 되는 두 점을 올립니다. 다소 의아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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