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 유전(流轉)

by 황성동

작업실 유전(流轉)


쾅쾅쾅!

작업실 철문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누구시죠?”

문 너머로 조심스레 묻자,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남부지방법원에서 나왔습니다. 집행관입니다.”

순간, 심장이 ‘툭’하고 내려앉았다. 예전에 ‘집달관’이라 불리던 이들이 떠오르며,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빨간딱지’ 장면이 눈앞을 스쳤다. 설마, 내 작업실에 그런 일이 닥친 걸까?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가 내미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순간, 하늘이 노래졌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더니,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2006년 11월 무렵. 등촌동 주택가, 오피스텔 지하에 있던 작업실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12월에 열릴 세 번째 개인전을 앞두고, 나는 몇 달 전 급히 그 공간을 전세로 구했다. 당시 흔히 보던 부동산 거래 신문인 ‘벼룩시장’을 통해 알게 된 곳이었다. 학교 미술실에서 작업하는 것이 불편해져, 집 근처이면서도 넓은 평수와 높은 천장, 적당한 가격이 마음에 들었다. 다소 부담되긴 했지만, 관리비만 내면 되는 조건이라 괜찮았다. 전세금은 언젠가 돌려받을 수 있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직접 방문해 보니 이전 세입자도 나처럼 미술 작업을 하던 작가여서 더 안심됐다. 계약을 위해 연락했을 때, 집주인이 아닌 부동산 측에서 모든 절차를 대리하고 있었다. 꼼꼼히 계약서를 읽어보지도 않고, 선해 보이는 젊은 ‘고 부장’이라는 담당자의 말만 믿고 도장을 찍고 전세금을 건넸다. 학교 미술실에 있던 짐을 옮기고, 여유롭게 작업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을 무렵, 나는 법원에서 날아온 통지서를 받게 된 것이다.


부랴부랴 찾아간 부동산은 이미 자취조차 없었다. 뉴스에서만 듣던 ‘떴다방’ 사기였다. 경매로 넘어간 건물에 전세로 들어갔던 것이다. 계약서에 적힌 부동산 대표를 수소문했지만, 마땅한 단서조차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구청 담당자를 붙잡고 사정사정 끝에 진상을 알아냈다. 아뿔싸, 그 대표는 인천에 사는 젊은 여자로, 명의만 빌려준 존재였다. 법률 조언을 받아 가며 내용증명을 보내고, 결국 법원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살면서 절대 겪지 말아야 할 ‘재판’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준비서면을 공들여 작성했다. 몇 달에 한 번 열리는 재판은 단 10여 분 남짓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첫 두 번의 재판에서 판사의 일갈은 마치 내 편을 들어줄 것처럼 느껴졌다. 이길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있었다. 명의만 빌려준 부동산 대표는 “난 아무 잘못 없다. 사무실 직원들과 연락조차 없었다”라며 발뺌했다. 그러면서 재판장 밖에서 “500만 원이라도 물어주겠다”라고 했다. 그때라도 받아뒀으면… 패소한 뒤에야 그 제안이 떠올라 두고두고 후회됐다. 2007년 말까지 몇 차례 재판이 이어졌고, 결과는 ‘기각’. 나의 패소였다. 작업실로만 사용하던 공간이라 주소 이전은 생각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전입신고도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나는 ‘대항력’ 없는 세입자가 되었고, 보호받을 수 없었다. 피 같은 전세금을 통째로 날린 셈이다. 전세 계약 후 ‘확정일자’를 받고 전입신고를 하지 않으면 공매 시 우선순위에서도 밀리고, 소액이라도 구제받기 어렵다는 걸 그때 알았다. 항소를 고민했지만, 바쁜 일상과 담임 업무에 치여 결국 항소는 포기했다. 전년도 12월에 열렸던 개인전조차 충분히 집중하지 못한 채 끝맺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다음 해부터 법이 바뀌어 몇천만 원 이하의 전세금은 확정일자가 없어도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 젠장할!


대학원 시절, 망우리의 허름한 화실이 나의 첫 작업실이었다. 그러다 90년대 초, 교사로 임용된 뒤에는 공능동에서 후배와 함께 학원 겸 작업실을 열었다. 희망으로 문을 열었지만, 곧 적자의 늪에 빠졌다. 보증금도, 대출금도 몽땅 날려버리고는 석계역 인근, 서민 아파트 지하실로 급히 옮겼다. 그곳은 침대에 누우면 천장 위 가득한 하수관으로 오물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 감으면 그 소리가 산골짜기 계곡의 물 흐름처럼 들리곤 했다. 현실은 고단했지만, 귀는 자주 환상을 좇았다. 밤이면 전기가 자주 나갔다. 정전의 어둠 속, 윙윙대는 기계음이 공간을 파고들었고, 그 속에서 나는 캔버스를 마주했다. 학교 미술실을 사용할 수 있을 땐 그나마 나았다. 숙식이며 출입이 자유롭진 않았지만, 한쪽 구석이라도 내 공간이라 여길 수 있었다. 이종사촌 동생의 간판 집이 있던 화곡동 지하실에서도 몇 해를 버텼다. 그 뒤 등촌동 오피스텔 사기를 당하면서 또 한 번 터를 옮겨야 했다. 가까운 건물 1층, 셔터 달린 작은 차고에서 몇 년을 지냈다. 쥐가 날뛰는 좁은 공간, 바닥은 늘 눅눅했고, 일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큰아이가 두 살 무렵, 광명으로 이사하면서 비로소 안정된 작업실을 갖게 되었다. 참으로 기약 없이 고단하고, 비루하며 허접하기도 했던 나의 ‘작업실 유전(流轉)’이었다.


미당의 시 「국화 옆에서」가 문득 떠오른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긴 세월의 고단한 유전 끝에, 지금의 작업실이, 마치 그 시 속 국화처럼 내 곁에 와 있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허름한 지하실, 학교 미술실, 셔터 달린 차고. 무명과 가난, 쥐들과 기계음 사이를 떠돌았다. 그 시절의 나에게, 이제는 한 줄기 애틋한 연민을 보낸다. 그리고 처와 가족의 배려가 고맙다.

부족한 형편으로 지하실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편안하고 안정된 작업실에서 나는 오늘도 무명(無名)과 고독을 벗 삼아, 겸허히, 명상하듯, 경건한 기도처럼, 냉탕과 온탕을 반복하며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2025. 6. 3


20250629_15380111.jpg 작업실 2025년 6월 29일 2025 인간기둥 Human pillar series, Yellowsmile series 노란 미소 작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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