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쳐 간 학생은 조용히 손만 들어.”
반장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감은 눈을 타고 귀 끝을 스쳤다. 뱀의 혀처럼 귓속으로 감겨 들어왔다.
교실 뒤편, 반들거리는 플라스틱 책꽂이에 꽂혀 있던 ‘세계 명작 만화 문고’ 한 권이 사라진 것이다. 그 책장은 늘 반듯했던 모범생 김○○의 부모님이 학기 초에 기증한 것이었다. 당시엔 유명 만화가들이 그린 최고급 세트였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하루라도 먼저 빌리려는 경쟁이 치열했다.
없어진 책이 ‘이원복의 톰 소여의 모험’이었는지, ‘정한기의 삼총사’였는지는 이제 가물가물하다. 종례 시간에 책 당번이 그것을 알아차렸고, 담임 김○○ 선생은 반장 연○○에게 범인을 잡으라 명한 채 교실을 나갔다. 햇살이 기울어진 교실 안은 잿빛으로 변해 분필 가루와 희미한 먼지 냄새로 가득하다. 아이들의 숨죽인 침묵만이 그 속을 채우고 있었다.
그다음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범인이 결국 잡혔는지도, 그 후에 어떤 소동이 이어졌는지도 흐릿하다. 하지만 단 하나의 장면만큼은 지금도 선명하다. 반장이 손에 네모난 직사각형 지우개를 쥔 채 어깨높이까지 들어 올리며 말했다.
“범인으로 의심되는 아이는 이 지우개로 머리를 칠 거야. 맞은 아이는 손을 들어.”
순간, 지우개가 내 머리에도 ‘툭’하고 닿았다. 연필 실수를 지울 때 쓰이던 그 작은 지우개의 촉감이 싸늘하게 머리끝에서 등줄기를 타고 내려와, 소변이 차 있던 아랫배를 거쳐 방광까지 전기가 번지듯 찌릿하게 스며들었다.
그 묘한 감각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억울함과 당혹스러움, 그리고 말하지 못한 울컥함이 한꺼번에 몸속 어딘가에서 퍼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만화책을 좋아하고, 그림 그리기를 즐기던 소심한 아이였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던 탓일까. 아니면 마음속에 그 책들에 대한 은밀한 소유욕이 있었기 때문일까.
그날의 공기는 끈적했고, 코끝이 시큰했다. 교실 안을 짓누르던 침묵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그 뒤의 일은 아무리 떠올려도 기억나지 않는다. 마치 시간의 한 부분이 찢겨나간 듯, 기억의 한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그날 이후 나는 종종 그 구멍에 빠지는 꿈을 꾸었다. 어둠 속에서 지우개의 잔 가루가 흩날리고, 그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는 꿈이었다.
혹시 내가 결백에 집착하는 강박성향이 있다면, 그날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눈을 떠도 한참 동안 현실이 낯설었고, 억울함과 두려움이 섞인 감정은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 있었다.
그 시절 담임선생, 그리고 그를 대신해 권력을 휘두르던 몇몇 아이들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하다. 미제 버터와 소시지를 닮은 하얀 피부, 듬직한 덩치, 의기양양한 표정들. 그들의 폭력은 두려움과 억울함으로 내 안에 스며들었다. 이 글을 쓰며 그 이름들이 다시 떠오르는 건, 그 기억이 아직 내 안에 살아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반세기가 지나도 잊히지 않는 어린 시절의 잔상. 이름을 생략 안 하고 거론한 데서 보건대 어쩌면 이건 소심한 복수의 글인지도 모르겠다. 헛웃음이 난다.
최진영 작가의 〈어떤 비밀〉을 읽었다. 마음 한편이 서늘해졌다. 나에게도 학창 시절의 은밀한 기억이 몇 가지 있다. 그 시절의 장면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소심함이나 상처, 열등감의 한 조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세월의 나이테가 쌓여 그런 기억을 꺼내 볼 여유가 생겼다. 얼마 전엔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하루 종일 몰입해 보았다. 등장인물들의 눈빛이 낯설지 않았다. 담임선생을 대신해 은중의 손바닥을 때리던 상연의 모습에서 내 기억은 어느새 1973년, 초등학교 6학년 교실로 흘러갔다.
한 가지 기억을 더 해본다. 방과 후 교실에서 담임 김○○ 선생은 ‘서양 소시지와 버터들’을 모아 과외를 했다. 어떤 날은 공부 대신 조립식 장난감 ‘전동 기차’를 만들고 있었다. 그날 나는 청소 당번이었다. 집에 가려 고개를 꾸벅 인사하자, 선생이 나를 불렀다. 그러고는 장난감 기차가 든 상자 하나를 건넸다.
“이건 네가 가져가라.”
나는 기뻐서 1시간 넘는 길을 내달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상자를 열었다. 아뿔싸!! 사실을 아는데 거의 1~2분도 안 걸린 듯했다. 망가진 부품이 섞인 불완전한 세트였다. 순식간에 울음이 터졌다. 화가 났고, 너무 빨리 뛰어온 나 자신이 미웠다.
2025.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