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뒤의 노란 미소,
그리고 더 큰 첨벙

by 황성동

가면 뒤의 노란 미소, 그리고 더 큰 첨벙



아이들이 무심히 던지는 한마디에 뜻밖의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다. 며칠 전, 가족 톡방에 큰아이가 화가 앙소르의 그림 〈음모〉를 올렸다. 아내가 댓글을 달았다. “J가 이 그림이 아빠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고 하네. 영광ㅎ.”


요즘 나는 공교롭게 두 곳의 도서관에서 동시에 개인전을 열고 있다. 큰아이가 자주 가는 H 도서관에서는 7회 개인전이 10월 30일까지, C 도서관에서는 8회 전시가 11월 말까지 이어진다. 아내는 짧게 격려의 말을 남겼고, 아이들은 대체로 무심했다. 나 역시 감상을 묻거나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가족이 함께 미술관을 자주 찾았지만, 요즘은 영화 한 편 보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그 무심한 아이가 ‘앙소르’의 그림을 올렸다. 아무 말 없이 도서관을 오가며 내 그림을 본 것이 분명했다. 아들 바보인 내가 그 반응을 그냥 넘길 리 없다. 아이 덕분에 오랜만에 앙소르를 떠올렸다. 그의 작품은 주제나 색감, 분위기에서 내 작업과 닮은 점이 있다. 고흐나 피카소처럼 대중적 유명세에서 살짝 비켜난 화가였다. 30년 미술 교사 짬밥에도 불구하고 나도 그를 잊고 있었다. 아이의 사진을 보고서야 “아, 앙소르!” 하며 이름을 떠올리고, 검색창을 열었다.


제임스 앙소르(1860~1949). 벨기에 오스텐드 출신의 화가. 그는 평생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종교화의 장엄함과 일상의 혼란을 뒤섞어 해골, 가면, 광대, 군중을 그렸다. 색은 화려했지만 웃음은 씁쓸했다. 그의 그림 속 웃음은 환하지만 차갑고, 인물들은 살아 있으면서도 허기져 있었다.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에서는 신의 얼굴 대신 인간의 욕망이 행렬을 이루었다. 그에게 예술은 인간의 가면을 벗겨내는 행위였다. 앙소르는 웃음 속의 고독을 그렸다.

그의 그림을 보며 내 연작 〈노란 미소〉를 떠올린다. 레몬이나 콘돔, 혹은 모자처럼 보이는 물체를 머리에 뒤집어쓴 인물이 화면 중앙에서 웃고 있다. 그 미소는 지나치게 크고 위악적이다. 기쁨의 표정이라기보다는, 웃음이 한계까지 확장되어 뭔가 터지기 직전의 긴장을 보여준다. 웃고 있지만, 그 안에는 울음이 잠겨 있다. 노란색은 태양의 색이자 불안의 색이다. 그 강렬함은 희망과 광기를 동시에 품는다. 감정을 억누르며 웃어야 하는 시대의 초상, 혹은 사춘기적 불안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내 작품 역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가면의 초상’이다. 웃고 있지만 무표정한 얼굴, 과장된 입, 원형의 눈은 감정의 과잉과 공허를 동시에 드러낸다. ‘레몬색 머리’나 ‘과장된 미소’는 사회가 요구하는 긍정의 가면, 그 강박을 시각화한 것일지도 모른다. 반면 인물 뒤의 하늘과 구름은 자유와 초월, 혹은 내면의 순수를 상징한다.

물 위에 비친 색의 흐름은 웃음의 잔상이다. 하지만 밝은 위쪽과 달리, 아래의 색들은 불안하게 뒤섞여 있다. 그곳엔 초록의 흔들림, 검은 그림자, 붉은 떨림이 있다. 밝은 웃음 아래 감춰진 정서의 소용돌이, 그 심연이 느껴진다.


틈나는 대로 전시장에 들려 작품들을 객관화시켜 보려고 한다. 연작들에 나타나는 조형화된 ‘심연’을 보며, 2019년 데이비드 호크니의 서울전시에서 인상 깊게 본 〈더 큰 첨벙〉이 떠올랐다. 그러다 며칠 전 글쓰기 공부 중 자료로 제시되어 다시 관심 두게 되었다. 여전히 그 그림 속은 너무 고요했다. 사람은 없고, 물결만 남아 있었다. 누군가의 존재가 사라진 자리에서 오히려 소리가 들렸다. “첨벙.” 그 한 번의 물결이 끝없이 번졌다. 그 물속이 궁금해졌다. 표면 아래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깊이를 상상하다가 문득, 내 그림 속의 ‘물’과 마주했다.

앙소르의 가면, 호크니의 물결, 그리고 나의 노란 미소. 세 세계는 모두 보이지 않는 ‘안쪽’을 그린다. 앙소르는 외부의 가면을 벗기고, 호크니는 표면의 흔적을 붙잡았다. 나는 그 사이에서 웃음이라는 경계를 바라본다. 앙소르는 군중 속의 위선을, 호크니는 도시 속의 부재를 그렸다. 나는 그 틈에서 개인의 내면을 그린다. 화려함과 고요함 사이, 웃음과 침묵 사이에서. 세 그림은 결국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어디까지가 진짜인가.”


나는 오늘도 캔버스 앞에 선다. 노란빛을 덧입히고, 웃음을 번지게 한다. 그 미소가 진짜일 필요는 없다. 그 안에 인간의 온기만 남아 있으면 된다. 가면 뒤에도 온기가 있고, 웃음 속에도 진실이 있다. 앙소르의 가면과 호크니의 물결을 지나, 나는 오늘도 노란 미소 속에서 인간을 그린다.

좁고 답답한 작업실에 있던 작품들을 환한 조명 아래로 끌어냈다. 볼 때마다 마음이 흔들린다. 누군가 말했듯, 마치 발가벗은 채 대로에 나앉은 기분이다. “왜 저리 잔 터치가 많을까.”, “배경의 네모와 동심원은 왜 저리 어지럽지?”, “색은 또 왜 이렇게 튀는 걸까.” 하나하나 눈에 밟힌다. 그림을 너무 많이 걸었나 싶기도 하다.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그림 속 웃는 얼굴들 사이로 미세한 떨림이 번진다. 그 떨림이 바로 살아 있음의 증거다. 웃는다는 건 슬픔을 견디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 그 미소를 그린다. “저 그림 속에 내가 있다.”


2025. 10. 27


p1370146_sonjson.jpg 제임스앙소르-음모. 1890년. 캔버스에 유채. 벨기에 안트베르펜 왕립미술관
AA.27204999.1.jpg 데이비드 호크니, 더 큰 첨벙, 1967년. 테이트 브리튼 컬렉션,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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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미소-1 2024.jpg
심연 Abyss , 2025, 노란 미소-1 Yellow smil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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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노란 미소-2 Yellow smile-2, 2024, acrylic on canvas , 20호 F 72.7 x 60.6 cm

노란 미소 2025-1 Yellow smile-1 , 2025, acrylic on canvas, 20호 F 72.7 x 60.6 cm

노란 미소 2025-2 Yellow smile-2 , 2025, acrylic on canvas, 20호 F 72.7 x 60.6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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