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2 / 새로운학교지원센터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 와서 살고 지낸 지 어느덧 13년이 된 러시아 고려인 디아나입니다.
저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타슈켄트라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에서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배우고 경험하는 것에 늘 많은 관심이 있었고, 배움에 대한 아주 큰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런 관심과 욕심 덕분에 저는 3~4살 때부터 러시아어 글자를 읽고 필기체로 쓰는 것까지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유치원에서도 암기력이 뛰어나서 각종 대회, 행사에 나가며 공연하고 많은 상을 받으며 우즈베키스탄에서의 알찬 유년기 시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희 부모님은 지인이 한국에 와서 일을 하고 돈을 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돈벌이를 목적으로 저와 제 첫째 남동생을 외할머니께 맡겨두시고 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처음 한국으로 가셨던 날을 저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는 저도 5~6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고 부모님 없이 지낸다는 게 매우 힘들고 속상했을 나이여서 공항에서 집으로 가는 차에서 내내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납니다.
저희 부모님께서도 무척 힘들어하셨던 기억이 많이 나는 것 중 하나가 엄마랑 매일 전화를 했는데 전화할 때마다 우셨습니다. 그땐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점점 나이가 들수록 엄마가 그때 왜 힘들어하셨을지 이해가 갑니다.
생계를 위해 다른 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언어에 대한 지식도, 그 나라에 대한 배경지식도 없이 지내는 것은 정말 많은 책임감과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저는 누군가 롤모델이 있는지 롤모델이 누군지 질문을 하시면 저는 늘 저희 부모님이 제 롤모델이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아무 확신도 없고 많이 모르고 무서웠지만, 책임감을 느끼고 용기를 내셨기에 제 가족이 오늘날까지 많은 것들을 함께 이룰 수 있었고 앞으로의 미래도 그 시절이 있었기에 더 많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 저희 부모님께서 저희를 무척 데려오고 싶어 하셨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이유가 그땐 지금처럼 아이들을 외국에서 데려오는 것이 법적으로 어려웠고, 데려온다고 하더라도 일하고 계신 저희 부모님을 대신하여 저희를 봐주실 분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2011년에 막냇동생 학인이가 한국에서 태어났고 부모님께서는 저희를 한국에 데려와서 세 명을 다 같이 키우고 싶어 하셨지만, 법적으로 어려움이 있어서 엄마는 막냇동생을 한국에서 낳으시고 아빠랑 막내아우 학인이랑 같이 타슈켄트로 오셨어요. 그러고 시간이 더 지나 정말 하늘이 내려주신 선물처럼 법이 바뀌어서 저와 동생 모두 한국에 갈 수 있게 되었어요.
법이 바뀌자마자 저희 부모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저희를 한국으로 데려오셨습니다. 엄마, 아빠랑 같이 살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해서 어린 시절의 저는 한국에 가서 친구들이랑 한국어도 모르는 채로 의사소통해야 한다는 걱정, 학교생활 적응에 대한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2012년 7월, 한국에 처음으로 오게 된 그날의 행복은 평생 기억에 남을 거 같습니다. 세 남매를 타국에서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경제적인 문제도 발생했기에 아빠께서 먼저 한국에 오셔서 일을 하시고 첫째 동생은 외할머니랑 조금 더 있다가 가겠다고 해서 저랑 엄마랑 학인이 셋이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날 아빠께서는 저희를 공항에서 마중 나오셨는데 아빠를 보고 저는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학인이랑 아빠랑 엄마랑 저랑 이렇게 넷이 한국에 오자마자 이마트에 갔습니다.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처음으로 한국 젓가락을 샀는데 생각보다 제가 젓가락을 이용해서 밥을 잘 먹는 것을 보시고 부모님께서는 엄청나게 놀라셨습니다. 그날 다 같이 이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가서 집 앞에 있던 김밥나라에서 한국에서의 첫 끼를 먹었는데 그때 저는 느꼈습니다. “아, 한국이 이렇게 행복한 나라구나.”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아빠 혼자 일을 하시고 엄마는 막냇동생을 돌보시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를 초등학교에 입학시켜주려고 부모님은 저를 데리고 학교로 갔는데 이미 8월이 다 되었고 그때 입학하면 2학기만 보내고 2학년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한국어를 아예 모르기 때문에 수업 내용이 어려워서 힘들 수 있어서 유치원을 1년 정도 더 다녀보다가 적응될 때쯤 1학년으로 입학시키자는 교장 선생님의 권유로 인해 저는 유치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유치원에서 한국인 친구들과 함께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며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왔는데 선생님께 연락이 왔어요. 습득력도 빠르고 적응을 빨리하는 편이라 친구들이랑 전혀 어색함 없이 지낸다고 내일부터 1학년으로 등교시켜도 금방 적응할 거 같다고 연락이 왔고 다음 날 저는 신나게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습니다.
그 후로 몇 달 뒤 바로 첫째 남동생과 외할머니도 한국으로 오시게 되었고 엄마 아빠는 두 분이 함께 저희 모두가 한국에서 살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셨습니다. 비자 연장 체류자격 변경 그때는 몇 개월마다 비자 문제로 타슈켄트에 오가야 하는 상황이어서 비행깃값도 무척 많이 나갔고 생활비 아이 셋의 양육비를 다 감당하기 위해서는 엄마는 아르바이트하시며 일이 있는 날에는 무조건 나가서 열심히 하셨고 아빠는 밤낮 가리지 않으시고 거의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저희를 데리고 산책하시다가 회사 사장님을 만났고 회사 사장님은 저희 엄마가 애가 셋이나 있는 걸 보시고 “제인 씨! 애가 셋이나 있었어? 내일부터는 매일 나와요.”라며 엄마에게 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는 자리를 주셨습니다. 저희에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었죠, 엄마는 그때 너무 감사하고 행복해서 밤새 우셨어요. 어린 저는 엄마가 당시에 저희랑 다 같이 한국에서 살 수 있다는 게 행복해서 우시는 줄 알았는데 고등학생 때 이 이야기를 듣고 정말 우리가 처음 한국에 와서 어려울 때 옆에서 도와주신 한국인분들이 참 많이 있구나! 늘 느꼈지만 다시 한번 느껴서 나중에 나도 우리 가족이 힘들었을 때 받은 도움들을 잊지 않고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저는 웬만한 의사소통은 다 가능해졌습니다. 정말 친구들의 도움, 선생님들의 도움과 관심을 많이 받은 덕에 저는 언어의 장벽으로 인한 어려움을 전혀 겪지 않고 그렇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에 처음 입학했을 때 제일 기억에 남는 일화 중 하나가 학교에서 받아쓰기 100점이 너무 받고 싶은 마음에 베끼다가 걸렸던 경험이 있는데요 참 쑥스럽고 창피할 만한 일일 수도 있지만, 저는 제가 이렇게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한국어 받아쓰기 100점을 받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만큼 한국어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있었기에, 그런 행동까지 했던 제가 너무나도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덕분에 저는 그날 집에서 하루 만에 한글을 다 외웠고 그 이후 받아쓰기를 90점, 100점 받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온 지 두 달도 지나지 않아서 말이죠! 저는 무엇을 할 때 잘 되고 싶다면 욕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욕심들이 저를 성공에 이끌어줄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어주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비자 때문에 여러 번 타슈켄트에 오가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우리 가족은 다 함께 각자의 자리에서, 아빠는 열심히 일을 하시며 힘든 티 한 번도 내질 않고 가족을 위해 앞만 보며 하루도 쉬지 않고 늘 달려오셨습니다. 엄마도 한국어를 전혀 몰라서 발생하는 차별이나 언어적 부분에서의 갈등들 속에서도 우리 가족을 위해 버티신 덕분에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저는 학교에 한국어 소통이 어려운 전학생들에게 통역으로 도움을 드리며 “신동 통역사”라는 별명까지 가지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저는 한국에 온 지 3년 반 만에 웬만한 또래 아이들의 한국어 실력을 따라갈 수 있었고 선생님들은 모두 저에게 목소리만 들으면 한국인보다도 한국인 같다는 칭찬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러던 저에게는 2017년 5학년이었을 때 이중 언어 말하기대회에 참가하는 기회가 생겼고, 열심히 대사를 외우고 준비하며 많은 선생님의 도움과 친구들의 응원 덕분에 자신 있게 대상을 탔습니다. 그 후 저는 많은 전국대회 공연 등을 다니며 이중 언어 말하기 능력을 키워나갔습니다.
중학생이 된 저는 열심히 한국인 친구들이랑 다니며 공부했고 중학생 때는 학업에도 많은 노력을 했고, 그 와중에도 방학에는 제 모교인 초등학교에 가서 불과 몇 년 전의 나와 같은 친구들에게 대학생 멘토 선생님들이 저에게 한국어를 알려주시며 도와주셨던 것처럼 한국어 교실에서 통역 봉사활동을 맡으며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안성에 있는 안법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거기서 또 정말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서 더욱 성장할 수 있게 되었던 거 같습니다.
처음에는 중학교 때만큼 높은 점수가 나오지 않아서 힘들고 속상해했습니다. 선생님들께서는 넌 뭘 해도 성공할 거 같으니 너무 낙담하지 말고 언어 공부 열심히 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보라고 해주셨습니다. 정말 그때부터 러시아어 공부에 많은 시간을 보내며 동시에 사법 통역사 자격증 공부를 하여 사법 통역사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한국어 토픽 시험에서도 제일 높은 6급을 취득하였습니다. 그러던 고2 겨울방학에 중국어 공부를 시작해서 배운지 석 달 만에 중국어 자격증 HSK 1, 2급을 취득할 수 있었고, 외국어 공부를 할 때가 제일 재밌고 힘들어도 욕심이 커서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계속 노력하는 제 모습을 보고, ‘아 나는 외국어에 재능이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저는 ‘내리안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외국인들에게 노동 법률 상담 통역 봉사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신 모든 분의 노력에 항상 감사함을 느끼며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 제 일이 아니어도 누군가 문제가 생기거나 할 때 늘 제 일인 듯 항상 최선을 다해 통역하며 그 일이 해결되었을 때 당사자들보다도 행복하고 기뻤습니다.
어느 날은 제가 봉사활동을 하던 기관에 어느 젊으신 여성분이 오셨는데, 남편분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어린 딸을 혼자 키우시는데, 일을 할 자격이 아닌 비자라서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고 있긴 하지만 생활이 너무나도 힘들고 그렇다고 다시 본국으로 가기에는 본국에 살아갈 집도 가족들도 없다는 사연을 듣고 통역해드리며 몇 번의 통역으로 인해 시청에서 6개월 동안의 경제적인 큰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 1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여성분에게 그때 너무 감사했다고 연락이 오곤 합니다. 사실 그 사연을 듣고 정말 도움을 어떻게든 드리고 싶어졌던 이유 중 하나가 우리 가족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가 생각나서였습니다.
저희는 엄마 아빠 모두가 옆에 계셨음에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피할 수는 없었는데, 이 여성분은 혼자 딸과 자신의 생계를 타국에서 책임지고 있다는 사연을 들으니 우리 가족이 힘들었을 때 받았던 도움, 그리고 반대로 받지 못했던 도움들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무척 컸습니다.
좋은 일을 하면 언젠간 다 돌아온다는 말에 너무나도 공감이 갑니다. 그 일이 있고 3달 뒤에 제 대학 입시 결과가 나왔는데 그렇게 원하고 꿈꾸던 한국외대에 합격했습니다. 그때 이건 내가 잘 나서, 대단해서가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와드렸던 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저에게 더 많은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더 큰 기회를 주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억울하게도 퇴직금, 급여, 산재 처리 등을 받지 못해서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외국인들과 함께 노동부, 경찰서 등의 기관을 다니며 열심히 통역을 해드렸습니다. 언어 때문에 문제를 겪는 분들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드리면서 더 많은 발전을 해갈 수 있었고 더욱 넓은 배경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올해 저는 3월부터 대학 생활을 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기숙사에 입소하지 못해서 자취해야 하는 상황인데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저에게 최대한 티를 안 내시지만 힘들어하시는 부모님을 보며 간절히 도움을 받고 싶어졌습니다. 현재 첫째 남동생은 고2 둘째 남동생은 중1이라서 경제적으로 더욱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가장 힘든 부분 중 하나는 학교 근처의 집들이 다 보증금이 천 이상이라 학기당 생활비 제외하고 학교 등록금만 해도 500만 원을 내야 하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다문화가정인 저희에겐 여유가 도저히 생기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학교랑 거리가 있는 보증금이 100만 원인 낮은 지하층에서 생활하며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그래도 월세가 매달 40만 원 이상 나가고 있으며 곧 2학기라 등록금을 내야 하는데 두 달 전에 아빠께서 일을 하시다가 발꿈치를 크게 다쳐 수술받으셨고, 앞으로 반년 정도는 일하면 안 된다는 의사의 말씀을 들으셨습니다. 아빠가 많이 힘들어하시고 등록금, 자취비, 생활비에 대해 많은 걱정을 하시는 거 같아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저 또한 열심히 아르바이트하면서 어떻게든 생활비를 보태고 있긴 한데 이걸로 등록금을 모으는 건 방학 내내 일을 한다 해도 너무 오래 걸리고 현재 학교에서도 통역 공부를 쉬지 않고 방학에도 해야 하는 저에게는 많이 어렵고 큰 부담입니다.
사실 저희 아빠는 정말 살면서 제가 본 가장 성실한 분이십니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출근하시며 정말 심하게 못 움직일 정도로 편찮으시지 않은 이상, 감기에 걸려도 독감에 걸려도 쉬지 않고 매일 아침 일찍 나가셔서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을 하십니다. 그 덕분에 우리 가족 5명이 한국에 와서 이것저것 많은 것을 경험하고 체험하며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루 안 쉬고 일하셨던 아빠께서 아프셔서 거의 엄마 혼자 저희 5명의 생계를 이어가고 계십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너무 힘들어 보여 제가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은 마음에 장학금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학업에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다면 더더욱 열심히 많은 것을 배우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지만 더더욱 많이 노력해서 제가 받은 도움을 잊지 않고 성장해서 원하는 꿈을 꼭 이루고 나중에 꼭 저와 같은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미래가 아니더라도 현재에도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게 매일 매일 열심히 달려가겠습니다!
관심 가져주시고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24 여름호 목차
1. 시론
2.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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