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그늘>
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을 했다.
그런데 여전히 혼자인 나를 보며 중년까지 미혼이면 ‘어떤 기분이 들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만약 그때까지도 혼자라면 잘살고 있을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그리고 웃으며 살고 있을지 궁금했다. 너무 먼 시간이었기에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것만큼은 잘 챙겨 먹자고 생각했다. 나를 위한 한 끼의 음식을 정성스레 챙겨 먹으면서 자신을 잘 돌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혹시 모를 그때가 온다면 요리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정말 그때가 됐다. 중년을 훌쩍 넘겼음에도 인생의 짝꿍은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의 생각처럼 요리를 배우지는 않았어도 오랫동안 혼자 살며 이것저것 하다 보니 수준급의 요리 실력은 아니어도 먹고 싶은 것 정도는 할 수 있게 됐다. 혼자 산다고 대충 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냉장고가 비거나 유독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종종 집 부근의 마트에 간다. 마트에 가기 전에 사야 할 것들을 적는데, 이 방법은 꽤나 효과가 있다. 장 보러 가서 깜박 잊은 식자재나 필요 없는 것은 사지 않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가 양손 무겁게 들고 오는 경우가 없다. 그날도 장을 보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적힌 쪽지를 손에 쥐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표지판의 번호를 외우고 카트를 앞세워 서릿한 냉기가 어려 있는 매장 안으로 짓쳐 들어갔다. 손에 쥐고 있던 쪽지는 장 보는데 불편하지 않게 바지 속의 주머니에 넣어두고 기억에 의지하여 식자재를 찾아 나선다. 소소한 흥이라도 있는 날엔 티 안 나게 양발을 띄워 카트를 타기도 한다. 하지만 이도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들키면 정신 못 차린 철부지 어른이 되기에 시도할 때마다 참 눈치를 많이 본다.
주변을 쓱 훑어 진열된 상품과 사람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살짝 몸을 기대 카트를 밀고 바닥에서 슬쩍 발을 뗀다. 그렇게 타는 듯 미는 듯 카트를 타며 식자재를 찾다가 제철을 맞아 제집 안마당인 양 떡하니 한 자리 차지하고 ‘맘대로 까보슈~!’라며 엎어져 있는 옥수수를 봤다.
오동통한 속살은 거친 삼베 안에 숨겨두고 삐쭉 내민 은 갈색의 덥수룩한 수염을 쳐다보다, 그 수염이 엮어준 시간의 징검다리를 건너 언제였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추억 속으로 여행을 떠났다.
지금처럼 뜨거운 여름이었다. 얼핏 보기에 중년의 사내로 보였다. 하지만 머리칼은 말할 것도 없고 턱수염까지 희끗희끗한 것으로 보아 꽤 나이가 있는 것 같았다. 그 정도 나이면 아들이 고등학생은 될 법도 하건만 작은 텐트 안에 함께 있던 소년은 이제 끽해야 초등학생 정도였다. 계곡을 찾아 남들 다 떠나던 한 여름의 휴가철, 그곳에 함께 있던 그들의 모습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방학이던 아들에 비해 기나긴 휴가를 보내고 있는 중년의 사내는 뭔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잠시 지켜보니 처음엔 아내와 딸, 가족들과 함께였는데 오래되지 않아 모두 떠나고 아들로 보이는 어린 소년과 단둘이 남았다. 아들이 수영을 못하는지 물에 들어갈 때마다 구명조끼를 입혔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기필코 수영을 가르치고 말겠다는 듯 굳은 결의가 새겨진 얼굴을 하고 그 남성도 함께 냇가로 향했다.
아버지의 수영 실력이라고 해봐야 개구리, 개헤엄이 전부였다. 하지만 어린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수영 실력이 세계 최고였기에 구명조끼를 입고 물에 동동 떠 있기만 하는 자신에 비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아버지가 너무 부러웠다. 그렇게 그들은 단둘이 남아 심심하면 물에 들어갔다가, 배가 고프면 간단히 요기를 하고, 잠이 오면 작은 텐트에서 함께 잠을 자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옥수수수염이 엮어준 시간의 징검다리에서 먼발치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러다 냇가 건너 한 곳을 가리키며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하는 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궁금해진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아빠, 저거 옥수수 아니야?”
“어. 맞다. 누가 옥수수 심어 놨네.”
“아빠, 나 저거 삶아 주면 안 돼?”
“에잉! 안된다아. 밭에다 심은 거 보니 내다 팔려고 기르는 건데, 남의 거를 함부로 손대면 어떻게 하니.”
“치, 아빠는 어렸을 때 맨날 밭에서 서리해 먹었다고 자랑했잖아. 많이 말고 한두 개만 삶아 먹으면 될 거 같은데…”
“안된다아. 지금은 옛날하고 달라서 그러다 들키면 도둑질이다. 그리고 팔려고 정성스레 기른 거를 누가 훔쳐 가면 얼마나 맘이 안 좋겠니?”
“으잉, 그러면 한 개만 삶아 먹자. 그러지 말고 하나만 삶아줘라아.”
어린 아들은 혼자 노는 것에 지쳤던지 아니면 정말 냇가 건너편의 옥수수가 맛있게 보였던지 끈질기게 조르고 있었다. 난감한 표정을 하고 있던 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이 그렇게 조르는데 안 해줄 수도 그렇다고 해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몇 번 실랑이하다가 좀 뜸해지나 싶더니 이번엔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모기 같은 목소리로 “하나마안”을 외쳤다. 아버지는 그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웃는 얼굴을 한 채 아들을 봤고 아들은 누운 채로 모기처럼 웅얼대다 결국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디선가 뜨거운 김이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낀 아들이 살며시 눈을 떴다. 아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그렇게 안 된다고 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양은 냄비를 올려놓고 언제 가져왔는지도 모를 옥수수를 삶고 있었다. 그 모습에 신이 나 눈이 번쩍 뜨인 아들은 정말 행복한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그렇게 좋으냐 이눔아.”
“웅.”
“지금 먹으면 안 돼?”
“조금만 기다려 봐. 어디 보자. 거의 다 익었을 텐데.”
아들의 재촉에 양은 냄비 뚜껑을 열고 옥수수가 다 익었는지 확인한 아버지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수수를 꺼내 식히기 시작했다. 성질 급한 녀석이 데일까 충분히 식힌 뒤 아들의 고사리 같은 손에 들려주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 한마디 묻는다.
“맛있냐 이눔아?”
“웅.”
정말 신이 난 목소리였다. 그곳에서 내가 봤던 아들과 아버지의 모습은 어떤 삶의 번뇌와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 행복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가 잊고 살아왔던 사람만이 줄 수 있는 사람의 온기였다. 즐거운 표정으로 옥수수를 먹는 아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다가갔다.
“아이야, 정말 맛있어?”
“아니요. 별로 맛없어요. 아빠가 아무것도 넣지 않고 그냥 삶아서 맛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왜 맛있다고 했어?”
“음, 아빠가 안 된다고 했는데 저 때문에 삶아 주신 거잖아요. 맛없어도 아주 맛있어요.”
“아저씨도 하나 먹어 볼래요?”
그 아이가 건넨 옥수수를 손에 쥔 채 살짝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이가 묻는다.
“아저씨는 어때요?”
“너무 맛있어. 너무 맛있어. 두 번 다시는 이런 옥수수를 먹을 수 없을 것 같아.”
그렇게 아이 앞에서 눈물을 흘리다 점점 멀어지며 사라져가는 아버지의 모습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하고 만다.
아버지, 그때 아버지가 삶아줬던 그 옥수수는 이제 어디에서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게 너무 슬퍼 계속 눈물이 흐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