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그늘>
느껴보지 못한 낯선 감정이다.
불현듯 찾아온 나를 인지할 수 없는 분리된 감정은 아직도 어떤 고통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어색하고 낯선 느낌을 알아채기 시작하면 모래사장의 파도가 흐물흐물 물러나듯 어색한 감정은 사라져갔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뜨고 길을 걷고 지하철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나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실종된 인간이다. 흔적 없이 사라져도 그 누구도 나의 증발을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그림자와 같은 인간이다.
그래서 예기치 못하게 깊게 파고드는 절망은 나를 도망칠 수 없는 궁지로 몰아넣기에 누군가는 제발 이 감정을 알아봐 주기를 원했다.
2주에 한 번씩 만났던 치료자는(정신과 의사) 이런 이질감을 느낄 때, 어릴 적 고독의 감정과 연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무슨 의미인지 치료자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음에도 마음과 생각이 따로 놀기 시작했다. 나는 스산하고 메말라가는 감정을 느끼며 “책에 있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라고 했다. 순식간에 메마른 감정은 화가 되어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 어떻게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느냐?”고 반박했다.
나는 물건이 아닌 사람이라고 했다. 감정을 가진 사람이기에 치료를 시작한 지 수년이 넘어가는 지금까지도 겪어보지 못한 증상을 느낄 때면, 성인이 되어서도 통제할 수 없는 고독의 감정이 떠오르며, 그게 이질감의 원인인 것처럼 나를 더욱 짓누른다고 했다. (이때 내게 필요했던 것은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치료자의 조언보다 따뜻한 말 한마디였던 것 같다. 그저 내가 가질 수 없는 사람에 대한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갈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감정을 내담자에게 전달하는 것은 치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치료자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은연중에는 보듬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러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 그 화살이 치료자에게 향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참 미안한 일이다.)
이 말을 쏟아붓듯 내뱉고 나니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진료실을 나와 혼이 나간 멍한 눈으로 밖을 쳐다봤다. 그러다 너무나 익숙한 우울의 감정이 물밀듯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우울은 우울하다는 기분의 감정이 아니다. 날씨에 따라 사람의 감정이 오르고 내리듯 단순히 기분이 가라앉기만 하는 것이 우울의 본질이 아니다.
우울은 삶의 의기를 빼앗아 간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까지 앗아가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목석같은 인간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고 그날 해야 할 일을 허상으로 날려 버리기에 결국에는 눈만 껌뻑이며 썩지 않는 고깃덩이를 그 자리에 남길 뿐이다. 한동안 사라졌던 익숙한 감정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우울과 싸우지 말고 내 안으로 받아들여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강렬한 유혹에 눈을 감고 멍하니 있다가 지하철이 도착한 지도 몰랐다. 눈을 떴을 때 막 닫히기 시작했던 문으로 뛰어들다 팔이 끼었다. 시간 감각마저 상실했는지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과 달리 집에 다 와 가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시체가 되어 집으로 가다가 정오가 되도록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병원을 다녀온 뒤에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생각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 일단 억지로라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끼니를 챙겼고 잠시 몸을 움직이다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루의 열기가 식으며 열려 있던 창문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어둠이 채 들어오지 못한 방 한구석에는 어떤 아픔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비루한 몸을 둥글게 말고 내가 누워있었다. 늘어지지 않는 쇳가락을 불에 달구고 망치로 때려잡듯이 언제나 쉽게 펴지지 않는 몸을 천천히 폈다. 그리고 더 이상 병원에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려면 약을 끊어야 했다. 약을 먹지 않아도 될 만큼 증세가 호전되면 치료자의 지도하에 복용량을 줄인다.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금단 현상을 관찰하며 조금씩 단약을 하게 된다.
이 방법 이외의 독단적인 단약은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미치도록 끊고 싶었다. 그래서 약을 받기 위해 다시 그 공간과 상황으로 나를 밀어 넣는 어리석은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을 굳힌 뒤 정상적으로 복용해도 매주 부작용을 겪었던 트라린정을 반으로 잘라 50mg 정도를 먹었다. 그리고 나머지 약은 휴지통에 버렸다. 아예 트라린정 마저 먹지 않으면 초반에 몰아닥치는 금단 현상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50mg으로 버티며 병원에 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약을 끊었던 그날, 일정한 농도로 유지되던 약물이 감소하자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수면 장애가 다시 시작됐고 신체적인 금단 증상으로 일상생활도 무너졌다. 단약으로 인해 가장 힘든 점은 체온 조절이 안 되는 것이다. 갑자기 온몸에 열이 나며 땀을 쏟았다가 반대로 오한이 들며 몸이 떨린다. 이런 증세가 반복되어 나타나니 몸이 적응할 수가 없다.
사람은 정신과 몸이 하나다. 정신이 무너지면 신체가 무너지듯 몸이 무너지면 정신도 같이 무너진다.
그렇게 내 삶이 또다시 망가지는 것을 보며 과연 이 선택이 맞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몸이 녹아내렸을 때 알아차리지 못한 마음의 고통이 원인이었다면, 자신을 돌보지 않고 가혹하게 몰아붙인 누적된 시간이 지금의 결과였다. 그래서 자신을 돌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청결과 건강을 유지하는 게 다가 아니다. 항상 마음을 살피고 지금의 감정을 되돌아보는 것, 그것이다.
하루라도 마음 편히 살고 싶었다. 불안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한 채, 온전한 나로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 하는 행동이 정말 나를 위한 일인지 고민하게 됐다. 오히려 극단적인 금단 증상을 겪으며 참고 견디는 일이 또 다른 자해가 된다면 그건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었다.
지금의 선택이 ‘또다시 나를 몰아붙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의 결론은 어떻게든 나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날 다시 약을 먹었다.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며 잔인한 안개 속을 계속 걷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