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러지지 않은 거친 표면이 가슴을 때린다.
숨기려 했던 감정이 무디지 않은 칼날이 되어 그대로 마음을 헤집고 들어온다. 어떻게 피할지 모르기에 숨결에 실린 역겨움을 맡고 눈에 담긴 찰나의 경멸을 그대로 느낀다. 그렇게 내가 스러져간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없는 감정을 잡아낼 수 있기에 이 모든 것이 혼란되어 나를 괴롭힌다. 어떨 땐 천부적인 능력이라 생각했다. 올 곧이 집중하지 않아도 눈빛과 움직임, 사소한 변화가 눈에 들어왔고 주변을 감싸는 공기의 온도를 날 선 피부로 느끼며 그 사람과 하나가 됐다. 이렇게 의도하지 않은 감각은 내게 많은 대가를 요구했다. 나의 오감은 항상 자신이 아닌 타인을 원했고 그들에게 초점을 맞춰 쓸모없는 신호와 잡음을 가져왔다.
쉬이 지쳐만 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장거리 달리기를 한 마냥 가슴은 터질 듯하고 올라오는 열기에 얼굴이 타는 듯하다. 의도적으로 사고의 행방을 돌려도 통제에 화답하지 않는 나의 마음은 주변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표정, 작은 행동까지 가슴에 담아낸다. 그래서 그곳엔 내가 없다. 많은 일상이 자신이 아닌 타인에 의해 돌아가기에 온몸 구석구석 소중이 숨겨둔 나의 기운은 순식간에 사라져 나를 잃게 만든다. 누군가의 표정을 보며 그대의 기분을 살피는 것, 자연스레 스며들어온 상대의 감정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기에 일을 하건, 밥을 먹건, 심지어 혼자 있을 때에도 그 감정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래서 때론 벗어날 수 없는 삶이 감옥처럼 느껴지며 나를 갉아먹었다.
처음엔…
다른 사람도 나처럼 사는 줄 알았다. 모든 걸 보고 느끼며 흔들거리는 삶을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무심히 던진 한마디에 가슴을 얻어맞고 온 신경이 곤두서 그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하루가 사라진 날이 있었다. 그렇게 완전히 노그라져 나만의 안식처로 돌아왔을 때 지금의 삶이, 나의 태도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깨달음이 왔다. 어쩌면 예민함으로는 퉁 칠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기질적인 이유이건, 아니면 시간을 거스른 과거의 나이건 현재의 내가 가진 여러 감정적인 반응은 오히려 나를 아프고 힘들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가 가진 예민함이 너무나도 싫었다.
극한의 예민함을 가지고 산다는 것…
행복보다 불행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절대적인 의미이다.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만 간신히 하루를 버텨낼 수 있다는 뜻이다. 극한의 예민함에 동반되는 날카로움으로 타인은 이해 못 할 마음속의 어둠과 감당조차 불가능한 삶에 짓눌려 산다는 또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선택되지 않은 혼란에 끌려들어 가야 하는가? 거부조차 불가능하다고 해서 내 삶이 송두리째 거칠기만 해야 하는가?
이 세상의 모든 것엔 양면성이 존재한다.
한 면의 짙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을 땐 아무것도 볼 수 없기에 내가 있는 이곳 말고 다른 곳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안다. 절망이 또 다른 축복이 될 수도 있음을 말이다. 내게 극한의 예민함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다채롭고 풍만한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다. 햇살에 실려오는 봄기운을 느낄 수도, 쏜살같이 스쳐가는 바람결의 냄새 하나가 마음을 아늑하게 만드는 마법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한정된 감정이 아닌 선택의 범위를 정의할 수 없는 다 감각을 지니고 있기에 그로 인해 탈진할 정도로 지치고 괴로우면서도 남들에겐 똑같을 일상의 순간이 때론 축제로 다가오는 찐한 감동의 여운을 모른 채 살았을 것이다. 언제든 뇌리에 남은 그 순간을 곱씹어보며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행복, 그 자체말이다.
바람이 분다.
피부로 느껴지는 달콤한 부드러움이 코끝에 닿으면 진한 여운이 남았다. 그래서 뜻하지 않은 우연의 숨결에 행복한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언제나 걷던 길, 평소와 다를 게 없어도 시간이 흐르며 계절이 지나면 소소한 변화 하나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지난했던 그날의 삶이 축복으로 변했다. 조금 서늘한 차가움에 따스한 햇살이 비쳐 내리는 봄이 오면, 가만히 눈을 감고 달달한 따뜻함에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댔다. 눈꺼풀 위의 강렬한 태양의 열기를 느끼며 조금은 서늘한, 차가운 바람이 날 쓰다듬고 가면 그 자리에 멈춰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이 충만해졌다. 비 오는 날이 좋았다. 비가 내리면 주변을 가득 채운 촉촉함과 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허공에 가득 찬 독특한 정취가 새로웠고 그렇게 나만이 아는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진 극한의 예민함을 너무도 사랑한다. 아파하고 상처받더라도 지금의 다채롭고 풍요로운 생명의 시간들을 느끼며 그렇게, 계속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내게 주어진 예민함이 삶의 축복이자 행복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