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마음이 아프면, 술을 끊어야 한다.

by 꽃비

2017년…


마흔이 됐을 때,


술을 끊었다. 이렇게까지 금주를 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지는 않다. 그냥…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즐기진 않았던 것 같고 술자리가 좋다 생각했지만, 사람을 만나는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한 모금의 알코올이면 나에겐 충분하다.


하지만 이유 없이 울고… 눈물을 통제할 순 없을 땐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다리가 꼬이며 몸이 흔들리면 정신이 흐리멍덩해지며 마음도 몽몽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생각이란 게 되지 않았다. 그저 흔들거리는 몸이 마음을 흔들면 이젠 마음이 이끄는 대로 몸이 따라갔다. 그래서 슬퍼졌다. 견딜 수 없이 아프고, 차갑고, 나를 누르던 두려운 고독감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가득 고인 눈물이 떨어지던 그 찰나의 순간을 빼곤, 짙은 어둠 속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아무도 반겨주는 이 없는, 어차피 혼자 있는 삶이라면, 누구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상 속으로 나를 던져 버리고 싶다고 말이다.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른다. 그냥… 무엇에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지금을 버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충만한 행복감과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온통 상처투성이인 이곳을 떠나면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될 듯싶었나 보다. 그래서 나고 자란 곳을 떠나 여기로 왔다. 곳곳에 야자수와 수풀이 우거져 있고 순식간에 비가 온 땅을 휩쓸며 일 년 내내 뙤약볕이 내리쬐는, 하늘길을 따라 두 번의 비행을 해야만 닿을 수 있는, 멀리 떨어진 낯선 곳으로 말이다.


이곳에서의 삶은 참으로 단순하다. 눈을 뜨면 덜컹거리는 차를 타고 하루를 시작하며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이질적 문화를 온몸으로 견디다 보면 지난한 하루가 지나간다. 다음날도 별반 다를 건 없다. 먹고 마시고 즐길 것이 없기에 사소한 변화 없이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모두 같다. 이렇게 반복적인 하루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먼저 정신을 무너뜨리고 마음을 바스러뜨린다. 이렇게 견디기 어려운 순간이 오면 운동화 끈을 질끈 매고 밖으로 뛰쳐나간다. 아직 채 식지 않은 아스팔트 위를 내달리면 실존하지 않던 다리의 근육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줄도 몰랐던 심장이 미친 듯 널을 뛰며 온 신경이 호흡에 집중될 때, 머릿속에 가득 찼던 상념이 사라지며 내일을 반복할 작은 힘이 생겼다.


잊고 있던 오랜 인연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더구나 머나먼 외지에서라면 그 즐거움은 배가 된다. 서늘한 바람조차 사치스러운 혹서의 땅에서 다시 만난 뜻밖의 인연은 메마른 마음의 환희가 됐다. 그래서 그랬나 보다. 코끝을 찌르던 날것의 알코올이 스모크 한 달콤함이 되어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진한 사람의 냄새가 났다. 그래서 그날은 술이 아닌 내가 절대 가질 수 없는 따스함에 취해 버리고 말았다.



또 한 번 폭우가 휩쓸고 지나갔다. 택시에서 내려 숙소를 향해 걷는데 바닥이 질척거리며 흙탕물이 튄다. 곳곳에 웅덩이가 패여 발이 빠지기도 하고 때론 더한 진창을 만나기도 한다. 지금 걸음을 붙잡는 이 길처럼 그렇게 도망치고 싶어 여기까지 왔음에도 다시 수렁에 빠지고 만다. 술을 끊은 뒤 잊었던 아픔과 절망이 되살아난다. 그렇게 또다시 눈물이 고였다. 나름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폭풍이 또다시 나를 무너뜨리려 한다. 그냥… 너무 큰 고독감에 무의식에 묻고 살았던 가슴을 후벼 파는 고통이 다시 온다. 그곳을 떠나면 이 아픔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이제야 알게 됐다.


마음이 아프면, 술을 끊어야 한다.


반드시 끊어야 한다. 과도한 술은 전전두엽을 마비시켜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삶을 몰아간다. 전전두엽이 꽉 붙잡고 있던 평온함을 깨뜨려 우울감을 불러오고, 또한 강하게 증폭시켜 상황을 악화시킨다. 술을 마시면 진정되고 위로받는 느낌은 알코올과 마음의 병이 만들어내는 콜라보일 뿐, 진정으로 불안과 우울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잊고 있던 감정을 되살려 나를 집어삼킬 뿐…


그래서 더 위험해진다. 더 깊은 암흑 속으로 빨려들 거나 심지어 나를 해하려는 격한 감정과 생각이 몰아쳐 그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게 되면 참으로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 모두 이런 죽음을 위해 병원에 다니고, 약을 먹고, 그래도 나아지지 않는 불안과 우울 속에서 허우적대며 그날 하루를 버티는 게 아니지 않은가? 시간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에겐 아직 못다 한 꿈이 있고 하고 싶었던 일이 있고 미련이 남은 수없이 많은 일들이 있지 않는가? 시간이 없어서 못했고, 돈이 없어서 포기해야 했던 참으로 찬란했던 시절의 내가 꿈꿨던 이 모든 것이 영원한 미완성으로 남게 된다.


그러니 술을 끊자. 술은 당신과 나에게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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