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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 Aug 22. 2023

박지향 제국주의 비판



박지향의 제국주의는 굉장히 오류가 많은 저서다. 비록 인터넷에서 제국주의를 논하는 때에 수정주의적 시각으로 소개되면서 이 책의 논지가 자주 인용되고 그 근거가 되긴 하지만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대체로 식민지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전달하고 식민지의 가치와 목적을 왜곡시키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주장은 식민지의 경제성과 본국의 이익에 관한 내용이다. 저자는 식민지에서 얻은 이익이 통설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데 반해 본국이 식민지에 투자한 비용은 막대하여 정작 식민지의 경제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고 주장한다.




'윌러스틴 류의 세계체제론이나 저발전론을 주장하는 제3세계학자들은 원료의 공급지 및 제품의 시장으로서 식민지가 매우 중요했고, 식민지에서 창출된 이윤이 산업혁명의 처음 단계의 자본을 제공하는 데 결정적이었으며, 이 관계는 산업화 이전에 이미 성립되었다고 주장해 왔다. 이에 대해 최신 연구들은 그러한 주장이 단지 신화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대양을 연결하는 망은 16세기에 만들어졌지만 중주의 시대의 국제적 상업을 진정한 의미의 세계경제로 구체화하는 것은 현재적 개념을 역사에 잘못 적용하는 것이라는 비판인 것이다, 교통 통신상의 제한 때문에 유럽의 전통사회와 식민지의 경제관계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오히려 산업화로 인한 기술혁신이 있은 후에야 서유럽은 세계 여러 영역을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p87




저자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본국은 식민지에서 생산되는 석탄, 철광자원 등의 생산원료들을 수입하지 않고 오직 자급자족하여 필요량을 충당하고 산업혁명을 일으켰으며 본국이 산업혁명으로 경제력을 향상한 다음 생활수준이 높아진 것이지, 식민지의 존재 때문에 생활수준이 높아진 것이 아니다. 즉 앞과 뒤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한 식민지에 대한 수출 수입 무역량을 비교해 보았을 때 본국에서 식민지에 대한 수출량이 생각보다 적고 대부분의 식민지는 인구 또한 적어서 소비시장으로서도 적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잉여생산물을 소비할 수 있는 시장으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열강들은 국가의 위신을 세우고 전 세계 야만적이고 미개한 국가나 부족단체들에 문명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무리한 팽창정책을 진행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들로 인하여 식민지는 본국에 제대로 된 경제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점차 제국의 애물단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 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열강들은 식민지를 하나둘씩 포기하게 되었다.




이 책의 다음과 같은 주장들은 중점적으로 식민지의 경제성에 대한 의문, 열강들의 목적을 새롭게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통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흥미로운 주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 대부분이 사실과 맞지 않고 또 의도적으로 사실근거들을 은폐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을 다음과 같은 주제들로 비판할 수 있다.






1. 식민지가 기술발전에 미친 영향







저자는 식민지의 발생과 기술발전에 의한 본국의 경제력 향상 중 후자가 먼저 나왔기 때문에 전자가 확립되었다고 주장한다.




'유럽의 전통사회는 생활수준과 소비 정도에서 식민지와 큰 차이가 없었는데 산업혁명이 그것을 훨씬 더 확대시켰다. 영국의 일인당 차 소비는 1700년의 10g에서 1790년에는 520g, 1910년에는 2350g으로, 산업혁명 이후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에서의 설탕 소비는 1700년의 0.5kg에서 1910년에는 17kg이 되었다. 이것은 산업화의 결과 생활수준이 향상하여 소비가 늘 때가 되어서야 거대한 식민제국이 이득이 되었으며, 중심부와 주변부의 경제적 차이는 산업혁명에 의한 근본적 변화가 있은 후에야 부각되기 시작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87p




이 주장에 대하여 과연 유럽 열강들이 식민지를 소유하지 않고 기술발전만 이뤘다고 해서 플랜테이션 농장을 식민지인들에게 강제하지 않고도 이만큼의 생산량을 유럽 본국들에게 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제쳐두더라도, 저자의 말과는 반대로 식민지가 먼저 있었기에 유럽의 기술혁명이 탄생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왜냐하면 영국의 산업혁명은 전적으로 인도에서 수입된 면직물에 의존하여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문양을 프린팅하는 노동자





17세기, 영국이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인도 면직물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보장받은 이후 영국 사회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면직물이 유럽에 상륙하기 전까지는 양모를 짜서 만든 모직물이 유럽의 유일한 옷감이었다. 모직물은 양모를 짜기도 불편하고 촉감은 거칠며 세탁하기는 굉장히 어려운 까다로운 옷감이었다. 그러나 인도에서 들어온 면직물은 촉감도 부드러우며 세탁도 용이하고 또 가격도 모직물에 비해 저렴했다. 영국에서 곧바로 폭발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면직물의 폭발적인 성장세에 위기감을 느낀 것은 기존의 모직물업자였다. 면직물이 수입되면 수입될수록 모직물의 수요는 줄어들었고 인클로저 운동 이후 모직업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했던 대지주들과 귀족들의 입장에서 인도의 면직물 수입은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대지주들은 의회를 통해 면직물 수입에 제동을 가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관세를 매겼고 이윽고 관세율은 50%를 넘겼다. 그럼에도 면직물에 대한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르자 영국 의회는 Calico Act 법안을 발의하여 인도에서의 면직물 수입을 금지하기 시작한다. 이 법안은 1700년과 1721년, 두 차례 입안, 강화되었는데 1700년에는 모든 인도산 면직물 수입품은 압류하는 것을 명시하였으며 1721년의 법안에서는 모든 면직물 상품의 사용 금지를 명시하였다. 이 법안은 1774년 법안이 폐기되기 전까지 면직물 수입에 대한 엄격한 규제를 가했다.




그러나 1730년 해외 면직물에 대한 모든 수입물품은 금지하나 영국에서 생산한 면직물에 사용하는 것은 사용을 허가하는 것으로 법안을 수정함으로써 영국 면직물 산업의 태동과 거대한 현대문명의 시작의 수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국의 산업자본가들과 발명가들은 법안이 수정되자마자 발에 부리나케 면직물 산업에 뛰어들기 시작한다. 혁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되었다. 1733년 영국의 발명가 존 케이가 기계적으로 면직물을 직조하는 방직기, 나는 북을 발명하였다. 이어서 1764년 제니 방적기가 발명되어 면화도 기계적인 생산방식으로 뽑아냈다. 방직기에서 짜낸 옷감을 사용해 방적기로 옷을 짜내니 면직물 생산 효율은 미친 듯이 늘어났다. 면직물 생산 효율은 미친 듯이 늘어났다. 아크라이트는 제니 방적기에 수력 동력원을 추가하여 수력 방적기를 발명하였다. 위와 같은 혁신과 발명들은 인간의 손으로 생산할 수 있는 양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양을 생산하게 하였고 산업혁명의 핵심적인 생산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매뉴팩처 시스템이  면직물 산업으로 완성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이제 더 이상 영국은 면직물을 수입하지 않았다. 대신에 영국이 차지한 인도 식민지에서 막대한 양의 면화 원재료를 저렴한 헐값에 수입하기 시작했다. 만일 인도 식민지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면화를 공급받지 못했더라면 영국의 면직물 가격을 보다 하락시킬 수 없었을 것이고 산업혁명의 속도도 미진했을 것이다. 영국이 면직물의 대량생산에 성공한 이후 영국은 모든 면직물에 대한 세계의 공장역할을 자처하게 되었다. 이윽고 그 생산 경쟁력은 인도의 면직물 산업을 넘어서게 되었으며 1800년대가 되면 인도는 면직물 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변모한다. 인도의 면직물업자와 수공업자들은 급속도로 몰락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인도 면직물 산업의 몰락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1870년~80년에 이르러서도 인도 국내 산업과 기술공들은 국내 직물 소비량의 25~45%를 공급할 수 있었다.'라고 하며 마치 별 것이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100년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역사적으로 이것의 수십 배는 되는 몇 천 년의 오랜 기간 동안 번성했던 한 산업이 최대 75%만큼(인도는 잉여생산량만큼 수출한 것을 생각한다면 75%를 상회할 것이다.) 위축되었다는 사실은 절대 가볍게 볼만한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오래 지속되고 번성한 산업이 세대가 지날수록 쇠퇴하고 몰락하는 참상을 직접 경험한 인도인들에게 얼마나 큰 상실감을 주었을지 짐작이 간다. 지금 시대에서도 예컨대 우리나라 조선업 수주량이나 반도체 생산량이 10% 감소했다고 하면 뉴스에 나올 일이라는 것을 상기해 보자.




인도의 산업과 경제 체계가 영국의 면직물 공장제에 의해 종속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1774년 이미 충분한 산업경쟁력을 확보한 영국은 더 이상 쓸모 없어진 Callico Act를 자연스럽게 폐기하였다.




위와 같이 면직물 산업의 눈부신 발전사를 살펴보면 영국의 산업혁명과 기술혁신이 얼마나 인도 식민지의 존재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발전해 왔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참고로 동인도회사가 처음 면직물을 수입했던 시점은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가 아니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 동인도회사의 잠재적인 식민지적 팽창주의적 야욕을 무시해서는 안되며 무역을 통한 자원 소비 욕구의 확장과 연장선이 식민지와 제국주의로 발전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설사 이 가정을 납득하지 못하겠다고 하더라도 산업혁명이 주변부의 영향과는 완전히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저자의 입장을 반증하는 증거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다시 한번 위 '제국주의'에서 인용한 문구를 상기해 보자. 인도 식민지와 영국 면직물 산업의 발전에 대한 관계를 알지 못했다면 영국의 면직물에 대한 욕구가 자급적으로 탄생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기술과 경제를 발전시킨 원동력과 동기, 그리고 욕구는 인도 식민지에서 수입된 면직물의 편리함에 유럽인들이 감탄한 것이 시작점이었다.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자원 소비량이 증가한 이유가 기술과 경제를 일궈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 이전에 식민지가 없었다면 기술혁신에 대한 동기조차 없었을 것임이 명확하다.







2.  열강이 착취한 식민지의 자원




그렇다면 생각해 보자. 과연 유럽이 기술발전만 일궜다고 위에서 말한 설탕과 차의 소비 수준이 증대되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유럽은 설탕과 차의 주 생산지가 아니다. 이러한 자원들은 식민지에서 생산한 것이다. 유럽의 소비 수준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식민지에서 그 소비 수준에 대응하는 설탕과 차를 생산하지 않았다면 유럽인들은 이것을 소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자원의 원산지 여부를 무시하고 소비 수준의 여하만 논하면서 정작 그 자원들이 직접 생산된 식민지의 존재는 외면하고 있다. 저자 본인의 말 안에 이런 터무니없는 모순이 숨겨져 있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식민지가 기여한 생산원료 공급지로서의 가치는 과대평가되어 있다. 왜냐하면 석탄이나 철광자원은 유럽에서 자급자족했기 때문이다.




'석탄과 석유 모두에서 선진국들은 수출국이었다는 것이다. 영국은 후에 제3세계라고 불리게 되는 지역에까지 석탄을 수출했ㄴ느데, 수출량은 1837년에 100만 톤, 1882년에는 2000 톤, 그리고 1913년에는 7800만 톤에 이르렀다. 독일도 석탄 수출국이었다. 한 마디로 서유럽에는 석탄이 남아돌았다는 것이다.




미국은 당시 최대 산유국으로 1870년대부터 수출을 시작하였다. 1913년 현재 선진국들은 석유에서 9%의 부족을 보였는데 주로 유럽에서 생산이 소비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때 석유는 유럽이 소비하는 전체 상업 에너지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동력자원이었다.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마도 전체 에너지 소비의 0.5% 미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진국들의 에너지 자급자족은 1939년까지 계속되었고 '-90p




'그러나 20세기 전반기 금속자원의 무역은 유럽 내에서 이루어졌다. 1914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선진국들이 사용한 금속자원의 90%가 다른 선진국들로부터 수입되었는데, 선진국들은 철, 구리, 납, 보크사이트, 주석, 망간 등 자신들이 소비하는 광물질의 98%를 생산하여 거의 자급자족 수준에 있었다.'-90p




그러나 내가 느끼기엔 마치 저자가 식민지에서 공급받아야 하는 생산 원료의 종류를 몇 가지 부분으로 단정 지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영국이 면직물 산업의 혁신을 일굴 때 수입한 원면화는 인도산이었다. 이 추세가 바뀐 것은 1793년 미국에서 면화에서 실을 자동으로 뽑아내는 조면기가 발명되고 미국 남부가 면화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전환된 이후이다. 이때부터 영국은 면화를 미국에서 수입하기 시작했다.




또 석유는 어떠한가? 아시다시피 유럽은 석유 산지가 아니다. 여기서 전부 인용할 수는 없지만 저자는 책 전반에서 영 제국의 상황을 에시로 들고 있는데 갑자기 뜬금없이 미국의 석유 생산을 언급하면서 석유의 자급자족을 논한다. 이것조차 이상한데 유럽이 석유를 자급자족했다는 주장은 도통 이해하기 어렵다. 이에 대한 변명으로 1차 대전 이전에는 석유 소비량이 적었다는 면피성 발언을 하는데 실상은 1차 대전 이후에도 유럽의 식민제국은 정상적으로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유럽의 명망 있는 주요 자동차 산업체들도 대체로 1차 대전 전후에 발족했다.




메르세데스 벤츠 - 1926년


폭스바겐 - 1937년


아우디 - 1910년


르노 - 1899


볼보 - 1927년


bmw - 1916년




1차 대전 전후는 이제 막 유럽의 석유 관련 산업들이 시작하던 시점이었고 1차 대전 이후에는 그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더구나 영국 정부는 대전 이전부터 석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대영제국의 존 피셔 해군 제독은 석탄연료형 전함을 석유연료형 전함으로 대체할 것을 정부에 건의했다. 마침 1911년 존 피셔의 친구였던 윈스턴 처칠이 해군장관에 부임하면서 대체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전쟁 직전 시행한 이 작업은 영국 해군의 전함 동력 효율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켰다.







이란석유회사의 관계자들









1908년 이란에서 발견된 대규모 석유 유전이 개발에 착수되었고 1914년 이 유전의 개발권을 맡은 영국페르시아석유회사(APOC)가 국영화되었다. 저자는 이것을 국유화되었으니 유럽의 석유 자급자족이라고 부르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란을 유럽에 속한 것으로 정의하지 않고서는 말이다.




또 1차 대전이 종식되고 프랑스와 영국이 가장 먼저 탐낸 지역이 바로 중동이다. 열강들은 오스만제국을 먹기 좋게 분리했고 그 지역은 마침 유럽 열강들에게 필요한 석유 산지였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1차 대전 이후의 팽창주의도 경제적 이익 여부없이 자기 위신을 상승시키기 위해 진행되었어야 하지만 그 지역에 석유가 산재해 있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 뿐일까? 이 시기에 중동 지역에서 얻은 석유 채굴권을 석유파동이 발생하기 전까지 유럽 기업들이 독점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 보았을 때 아랍의 석유민족주의 발흥 이전에는 유럽 열강들이 식민지 시대와 같은 권리와 이윤을 챙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는 저자가 언급한 부분에서의 모순을 지적한 것이지만 유럽이 식민지로부터 수입해야만 했던 원료들은 훨씬 더 다양하다. 전략자원, 사치자원, 기호품과 농산물 등등




고무의 발견과 활용은 2차 산업혁명에서 석유와 맞먹는 위치를 차지한다. 안타깝게도 이 고무나무 또한 유럽이 산지가 아니다. 울창한 열대우림, 특히 적도 부근에서 풍성하게 자생하는 이 원료는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식민지에서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특히 콩고의 경우는 벨기에의 그 악랄한 인권말살적 생산방식 때문에 너무나도 대표적인 고무 산지로 유명하다. 1890년 콩고에서 생산된 고무는 100톤이었지만 1910년에는 6000톤으로 폭증했다. 콩고에서 고무 1KG을 생산하는데 드는 비용은 0.13 벨기에 프랑밖에 안 들었지만 유럽에서 받는 수출가격은 10프랑에 팔렸다.  




유럽 열강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자원 수급을 위해 식민지 기후 조건에 맞는 다양한 플랜테이션 농장을 건설했다. 설탕, 과일, 향신료, 담배, 차, 비단, 고무, 커피 등등의 상품 자원들은 본국의 필요에 의해서, 입맛에 맞게 계획되고 생산되었으며 그 지역의 전통적인 산업을 철거한 뒤 생산 구조를 구축하고 재배열했다.









독일령 식민제국 기를 들고 서있는 현지인





독일 식민제국이 아프리카 식민지 지역에 투자하고 확장한 플랜테이션 농장의 발전 양상은 식민제국이 어떻게 그 지역의 전통적인 삶의 양식과 상관없이 경제와 생산구조를 재구성했는지 잘 보여준다. 독일령 동아프리카 식민지에는 4만 헥타르 규모의 사이잘삼 농장이 건설되었고 200만 그루의 커피나무가 심어졌으며 8만 헥타르 규모의 고무 목장, 그리고 거대한 목화 농장이 건설되었다. 독일령 동아프리카 식민지는 문명이 건설되지 않은 미개하고 야만적인 부족민들이 살고 있던 완전히 땅이 놀고 있는 지역이었기에 획일적이고 규격화된 플랜테이션 농장을 건설하기에 적합했다. 물론 그 지역에 살던 지역민들은 강제노동이 수반되었고 체벌과 폭력으로 다스려졌다. 노예제 또한 암묵적으로 성행하였다.




플랜테이션 농장의 규모의 경제와 피식민지민들의 강제노동 혹은 저렴한 품삯에서 비롯된 막대한 생산량은 식민지 본국이 소비할 수 있도록 저렴한 가격을 형성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앞서 봤던 유럽의 설탕과 차 소비량은 단순히 소비 수준이 증가해서가 아니라 식민지의 플랜테이션 농업의 증대와 생산구조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렇게 다양한 자원들의 생산과 수요를 몇 가지 한정된 종류만을 언급하면서 논의의 여지를 제한해 버렸다. 더구나 유럽에서 자급자족하던 몇 안 되는 일부 종류만 콕 집어서 말이다.




물론 경제성이 존재하지 않거나 많은 개발을 요구하는 지역도 존재하긴 했다. 저자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그런 경제적 가치가 있는 식민지는 식민지들 중에서 극히 예외이고 인도만이 경제적 가치가 있는 식민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기간에 급속도로 팽창된 식민지 내에서 인구밀집도가 미약한 지역 또는 자원이 전무한 지역은 상당 부분 존재할 수 있는 예상 범위이다. 애초에 그 거대한 팽창영역에서 쓸모없는 땅이 없을 리가 만무하다. 사하라의 거대한 사막지역처럼 말이다. 그보다는 콩고와 동남아시아의 고무산지, 남아프리카의 광맥지대, 아프리카의 커피와 설탕산지, 중동의 석유매장지역, 열대지방의 과일 농장, 동남아시아의 차와 향신료 플랜테이션 농장 등이 식민지를 팽창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오히려 경제성이 없는 식민 지역을 예외라고 넣어야 하지 않을까?









3. 영국의 무역량에 관하여




저자는 산업화 이전 영국의 해외무역이 생각보다 작은 규모였다고 주장한다.




'윌러스틴파의 주장과는 달리 산업화 이전에 해외무역은 유럽의 경제활동에서 단지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산업화 이전인 1780~1790년 유럽 총생산의 4% 정도만이 국경선을 넘었고, 1% 미만만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지로 팔려 나갔다. 이들 지역으로부터의 수입도 수출보다 그리 높지 않았다. 영국, 네덜란드, 포르투갈 같은 해운국들의 경우에는 무역의 비중이 다소 높아 수출은 18세기 후반기에 국민 총생산의 약 10% 정도에 육박했지만 그중 반 이하만이 주변부로 향했으며 주변부로부터의 수입도 10~15% 정도에 그쳤다. 물론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영국의 경우는 그중에서도 특히 높았다. 따라서 중상주의 시대의 주변부와의 교역은 서유럽의 장기적 발전에 커다란 중요성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89p




그러나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1790년 기준으로 당시 유럽이 구축한 세계 무역 루트를 살펴보자면 대표적으로 유럽-아프리카-서인도제도의 삼각무역, 영국 동인도회사의 인도-영국 무역,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향신료 무역 등이 있는데, 이런 주요 무역루트의 무역액을 전부 합산하더라도 유럽 총생산의 4% 이하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혁명 이전 프랑스령 아이티에서 수출한 설탕과 커피만으로 파산 직전의 프랑스 재정을 견딜 정도의 막대한 부를 가져왔음에도 말이다.






















다음의 표는 1790년 유럽의 해양 무역량과 18-19세기 주요 유럽 국가들의 gdp 대비 무역을 나타낸 것이다. 알아둘 것은 이 지표는 무역량을 나타낸 것이지 식민지와의 무역량을 나타낸 것은 아니다.




표를 살펴보면 저자의 주장과는 상당 부분 사실이 배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유렵의 무역량이 저자가 말했던 바와 달리 심각하게 미진하지 않다. 영국은 유럽에서 최대 수준의 무역량을 기록하였으며 명실상부 유럽 최고의 무역대국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무역이 유럽 주요 무역대국들의 gdp에 상당 부분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경우 네덜란드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붕괴하면서 무역 또한 붕괴했고 프랑스도 서인도 제도 식민지가 붕괴되면서 같은 현상을 보이고 있다.




네덜란드와 영국 같이 주변부와의 무역이 가장 활발하게 발달한 나라들이 초기 자본주의로 일컬어지는 금융 혁신의 주인공이었다는 것을 보면 저자의 말처럼 주변부와의 무역이 유럽에 긍정적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말이 무색해 보인다.




그렇다면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던 시기 산업화가 무역에 미친 영향은 어땠을까?




'산업혁명의 시작에 있어서 식민지 시장의 불가결한 역할이라는 가설은 영국에만 적용되는 가설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는데, 여기서도 산업화는 식민지의 중요성보다 앞섰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략) 산업혁명 초기에 견인차 역할을 한 면직물 제품 생산의 성장률과 수출의 신장률은 1750~1829년 간에는 그 상관관계가 특별히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수출이 영국 국민 총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801년 18%이었지만, 1841년에는 11%로 떨어졌고, 1851년에 다시 14%로 증가하였다. 한편 수출이 공업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801년에는 76%로 매우 높은 비중을 보였지만 1841년에는 32%로 떨어졌다. 만약 수출이 산업화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가정이 성립되려면 산업화가 가장 진척된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이후 시기에 수출의 비중도 가장 높아져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여기서 수출과 산업화의 상관관계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p-92,93




이 문구에서 저자가 수치를  사용하는 저열한 방식이 드러난다. 면직물 제품 생산의 성장률과 수출의 신장률의 상관관계를 도출하고자 한다면 면직물 생산량과 수출입량을 동시에 비교해야 옳다. 그러나 갑자기 그 사이에 국민 총소득에 비례한 수출량을 제시하는데, 이러면 당연히 면직물 산업에 관련 없는 총생산의 여분이 희석되기 때문에 비율적으로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공업 생산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율도 마찬가지다. 제철, 석탄업, 토목, 철도 등의 공업 산업은 수출과는 상관이 없는 내수용 산업이다.  전체 공업 산업에 수출량을 비율화 한다면 당연히 그 본질이 희석될 수밖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저자의 주장과는 다르게 유럽 각 국가들, 특히 영국의 무역량은 명백한 우상향 곡선의 발전 양상을 보여주었다.














위 지표는 1668년부터 1760년까지 영국 동인도 회사의 수입 물품의 수입량을 나타낸 지표이다. 위 지표에서 면직물 수입량이 시간에 따라 우하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 18세기 영국 면직물 산업계는 국내의 수요량을 충족하면서 자급자족을 향해 꾸준한 기술적, 생산적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만일 저자가 식민지와 산업화의 상관관계를 도출하고자 하였다면 수출과 공업 생산품의 관계를 비교할 것이 아니라 면직물 수입과 생산품 간의 관계를 비교해야 옳다. 인도에서 수입하는 면직물의 필요량을 자급자족하면 할수록 그만큼의 수입액 절약분을 자본축적하는 데 사용되고 산업화에 기여할 수 있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1820~1870년까지 50년 동안 서양 국가들의 무역 성장률을 확인한다면 무역량 총액이 산업화에 비례하여 증가한다는 것이 확인된다. 수출과 수입이 규모면에서 비대해지면서 주변부 식민지 시장과의 접촉과 무역량 또한 증가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저자는 수치를 필요에 따라, 경우에 따라 필요한 정보를 선별적으로 제시할 뿐만 아니라 주장과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선택적으로 편리한 수치를 사용한다. 수출 규모의 성장을 확인하고 싶다면 수출입량의 총액이나 증가율 같이 절대적 수치의 평가지표를 제시하면 직관적인 것을, 상관관계가 불명확한 대조군을 한데 엮어서 비율 중심의 지표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읽다 보면 불만거리가 생기는 요소이다.








위에서 살펴본 세 가지 논의를 통해 책 제국주의와 박지향 교수 주장하던 식민지의 경제성에 관한 오류들이 확인해 보았다.




이 책을 평가하면서 저자가 식민지의 경제적 이익은 최대한 과소평가하고 식민지에 제공한 근대적 유산들의 가치는 최대한 과대평가하는 대목들이 상당히 많이 나오는 것이 굉장히 우려스럽다. 두 가정은 양립 가능하고 실제로 그러했으나 관점과 해석에 따라 한 부분이 차별적으로 평가받는다는 것은 학자의 윤리적 소양을 의심해야 고민될 정도이다.




연장선 상에서 기회가 된다면 식민지 수헤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의 긴밀한 연관 관계에 대해서도 글을 써볼 생각이지만 책에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가장한 수혜론을 펼치는 듯한 서술과 관점이 심심찮게 보인다.




박지향의 책 제국주의가 식민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통해 신선한 논의를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주장과 논지는 역사적 사실과 매우 다르다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저자의 주장을 단순히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참조


https://en.wikipedia.org/wiki/Calico_Acts


https://intriguing-history.com/3092/

https://en.wikipedia.org/wiki/German_colonial_empire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03


https://sciencespo.hal.science/hal-03459838/docu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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