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녀부장 Apr 13. 2023

딴짓 덕분에 오늘도 출근한다

남의집에서 보이차를 마시며

SNS 덕분에 마음만 먹으면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됐다. 틴더, 아만다, 글램 같은 데이트 앱을 말하는 건 아니고. 적지 않은 회비와 독후감의 압박에 시달리면서도 1년 동안 열심히 참여했던 독서 모임, 스피커 장인의 음악실에 모여 주말 한 때를 우아하게 채워주었던 클래식 모임도 그 시작은 내 SNS 타임라인에 꽂힌 광고였다. 공통의 취향이라는 느슨한 연결고리로 엮여, 서로의 나이나 하는 일 따위에는 관심 가지지 않는 새 친구들은 쿨했다. 그렇게 주말 딴짓에 물이 올랐을 때 새로운 딴짓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가정집 거실에서 낯선 이들과 집주인의 취향을 나누는 거실 여행 프로젝트. 뭐지?! 너무 파격적인 컨셉이다.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것만 해도 야무지게 마음을 먹어야 하는데, 생면부지의 낯선 이들을 집으로 초대한다니...반대의 입장에서도 파격적이긴 마찬가지. 생판 모르는 남의 집에 가는 것도 낯선 경험인 데다, 함께 모이게 되는 예닐곱의 손님들이 모두 생면부지 낯선 사람들. 


그런데 말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뭔가 매력적이다. 패키지 여행상품에서 만나게 된 일행처럼 어차피 한번 스쳐가는 만남이니 부담 없이 한나절을 즐겁게 보내면 되는 것일 테니. 살펴보니 집주인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주제로 남의 집 거실이 열리고 있었다. 그림책, 보드게임, 마그넷, 플랜테리어, 내추럴 와인 등 익숙하거나 신박한 취향들이 커밍아웃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각종 차와 차호, 다구들로 둘러싸인 다실 사진으로 소개된 남의 집 보이차가 눈에 들어왔다. 포트넘앤메이슨 매니아이면서 한때 각종 블렌디드 루이보스 티에 매료되어 수십 종의 루이보스 티를 프라하에서 공수받아 즐기기도 했던 내게 차는 너무나 친숙한 대상이었다. 그런데 보이차라...비싼 중국차, 어르신, 까다로운 차호 등이 연관 단어로 마구 떠오르다가 효리네 민박에서 효리가 매일 새벽 보이차를 마시던 장면이 떠올랐다.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했다. 남의 집 보이차, 문을 두드렸다. 집주인은 글 쓰는 작가였고, 슬럼프를 겪을 때마다 보이차로부터 위로와 회복의 힘을 얻었다고. 평생 친구로 삼을만한 보이차를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작가와 보이차라는 조합이 마음에 들었다. 더군다나 작가님은 재기 발랄한 30대 여성이었다. 남의 집 보이차 입장권을 따내기 위해 참가신청서에 길고 정성스럽게 나를 소개했다.


참가 확정 문자를 받고 드디어 낯선 집주인의 다실에 7명이 둘러앉게 되었다.(알고 보니 상당히 높은 경쟁률과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한 것이더라) 켜켜이 쌓여있는 보이차, 수십 개의 차호, 개완, 찻잔, 공도배, 수반, 차판, 거름망, 집게, 아기자기한 액세서리로 가득 찬 다실에 입이 쩍 벌어졌다. 싯가로 계산해보면 분명 몇 천만 원을 웃도는 엄청난 덕질의 결과물이었다.(제대로 된 보이차와 자사호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격이 오른다) 보이차의 원산지, 생산방식, 생차/숙차, 보이차를 가장 맛나게 우려 준다는 자사호를 비롯한 각종 다기들에 대해 설명을 듣고 집주인이 정성스럽게 우려 주는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다섯 종류의 보이차를 호로록호로록 소리 내어 마시며 땀을 흠뻑 흘렸다. 속이 따듯해지니 살짝 긴장했던 마음도 말랑말랑해졌다. 서서히 드러나는 그날 손님들의 면면도 퍽이나 매력적이었다. 각자 개성 있는 캐릭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느 누구 하나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이도 없었다. 찻자리를 파할 때쯤에 너나없이 다시 한번 이 조합으로 차회를 열자고 입을 모았다. 낯선 집을 나설 땐 분명 어딘가 낯선 곳으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어라, 한 번의 가벼운 만남으로 끝날 줄 알았던 인연이 길게 이어졌다. 손님들의 열띤 요청으로 보이차 집주인 이작가님께서 심화반을 오픈했다. 5개월 동안 월 1회, 이제는 낯설지 않은 이작가님 다실에 모여서 보이차, 백차, 우롱차를 마시고 맛에 대한 느낌을 나누고, 좋은 차가 나오면 한 편을 공동구매해서 소분하고, 간간이 장비 부심을 채워줄 구매 좌표를 공유했다. 심화반이 끝난 후에는 분기별로 각자의 거실로 초대해 차회를 열었다. 어느새 우리는 각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서로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보며 응원하는 사이가 되었다. 매일 아침 보이차를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 보이차 친구들을 떠올린다. 오늘 아침 그들의 앙증맞은 자사호는 어떤 차를 우리고 있을까? 


상상도 못했던 3년의 칩거기간 동안 각자의 거실에서 적막하게 마시던 보이차. 이제 다시 거실에 모일 때가 된 것 같다. 새로운 차호도 개비하고, 차도 한편 공구하고...그래 내일도 차 값 벌러 출근해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밤 10시. 그들이 온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