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피드에 해외여행 사진이 부쩍 늘었다. 여름 휴가 항공권을 예약했냐는 질문도 잦아졌다.
할 일 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주말, 예고 없는 여행 뽐뿌질에 괜시리 여행책들을 들추기 시작했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행방이 묘연했던 여행 노트를 찾아냈다. 반가운 마음에 스르륵 노트를 넘겨보는데 작은 메모지 한 장이 나풀거렸다. 한 줄 읽고는 멋쩍은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롱롱타임어고 추석 연휴가 아주 예쁘게 자리 잡은 해(올해 또한 그러하더라^^), 연차를 이어 붙여 동유럽으로 휴가를 떠났다. 절반은 혼자서, 절반은 친구와 함께였다. 여름, 가을, 초겨울을 오가는 날씨에 보름 동안 부지런하고 나른하게 여행을 즐기다 보니 여행의 막바지가 되었다. 마지막 도시는 부다페스트. 여기서 이틀을 함께 보내고 친구는 한국으로 먼저 돌아가야 했다.
오후에 도착한 부다페스트의 첫 인상은 무뚝뚝하고, 낡고, 무거웠다. 아직 남아있는 공산국가의 흔적이 낯설었다. 도나우강 동쪽 페스트 지역은 도심 곳곳에서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다. 여기저기가 공사장이었고, 바리케이트가 둘러져 있어 어수선했다. 다행히 어둠이 내린 도나우강은 이번 여행 중 가장 우아하고 낭만적인 야경으로 완벽한 반전매력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애인과 다시 올 여행지로 부다페스트를 꼽으며 와인을 홀짝였다.
다음날 친구는 예정대로 떠났다. 함께하던 여행의 마지막 날을 혼자 보내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마음을 다독여 호텔을 나섰다. 살랑 부는 바람을 맞으며 호텔 앞 리버티 브릿지를 건너 마켓으로 향했다. 걷다보니 여행자의 흥이 살아났고, 이국적인 물건들이 가득한 마켓에서 오전시간을 탕진했다. 혼자서 늦은 점심을 먹는 동안 다시 쓸쓸함이 몰려왔다. 제대로 이국적인 이 도시를 더 배회해보고 싶은 마음과 그만 호텔로 돌아가 가방을 꾸리고 싶은 마음이 교차했다. 쇼핑한 것들을 주섬주섬 챙겨들고 다시 리버티 브리지를 건너며 마음을 정했다. 쇼핑한 것들을 가방에 차곡차곡 잘 구겨넣고, 호텔에서 편하게 쉬기로.
다리 중간쯤 이르렀을 때, 자전거를 끌고 가던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반듯하고 귀여운 외모의 헝가리 청년이었다. 오늘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고, 날씨가 너무 좋아서 여유를 부리며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는데 너를 보게 되어서 너무 반가워서 따라왔다고. 흠...오냐...그래서? 이쉬트반이라는 이름의 청년은 자신을 아마추어 사진작가라고 소개하며 한국에 대해 엄청난 호감을 품고 있음을 설명했다. 한 두 마디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에 다리를 건너 갈림길에 도착했다. 이쉬트반이 조금 쑥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저녁에 맥주 한 잔 사고 싶다고 했다.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7시에 호텔로비에서 전화할 테니 그때 기분에 따라 결정해도 된다고 했다. (이때는 왓츠앱도 페이스북 인스타도…그 어떤 SNS의 탄생도 예상하지 못하던 시절...) 그리고는 곧장 자전거에 올라타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부담스럽게 굴지 않아서 좋았다.
여행 전리품이 한국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가방을 잘 꾸리는 일은 빨리 끝났다. 해는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혹시나 했던 7시에 프론트에서 전화가 왔다. 말쑥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타난 그는 아까 보다 조금 더 귀여운 얼굴이었다. 호텔 앞에서 덜컹거리는 낡은 트램을 타고 수다를 떨며 페스트 도심지역으로 넘어갔다. 트램의 흔들림에 맞춰 좌우로 일렁이며 이것저것 열심히 설명해주는 이쉬트반이 참 반듯하고 성실한 청년으로 보였다.
그를 따라 내린 곳은 군데군데 공사장이 뒤엉켜 있는 어수선한 동네였다. 최근 로컬들 사이에서 최고로 인기있는 바에 간다고 했는데...반 발짝 뒤에서 따라 걷다 보니 금새 어둑해졌다. 이쉬트반은 가로등도 변변치 않은 으슥한 뒷골목으로 계속 향했다. 금방 도착할 거라 했지만 꽤 걸었고 어둠도 짙어졌다. 말수가 부쩍 적어진 내 눈치를 쓰윽 보더니 이쉬트반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막다른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 골목에 늘어선 오래된 건물들에는 간판 하나 걸려있지 않았고, 양쪽으로 갈라진 그 골목길 끝에서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힙플레이스 따위는 나타날리 없어 보였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계속 따라 가도 되는 걸까?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가자고 말하고 얼른 이 골목을 벗어나야 할까?’
여차하면 냅다 뒤돌아 뛸 생각으로 걷는 속도를 늦췄다.
‘아...나는 무슨 생각으로 낯선 남자를 따라 낯선 도시의 이렇게 으슥한 곳까지 온 걸까...세상 순진하게 굴고 말았네...하아..’
바로 그때 저만치 앞서 걷던 이쉬트반이 뒤돌아 나를 보며 팔을 길게 뻗어 가리켰다.
‘여기야’
그제서야 골목 끝자락에서 흘러나오는 하우스 뮤직이 귀에 들어왔다. 걸음을 재촉해 달려가 보니...세상에...제대로 찾은 로컬 힙플레이스였다. 곧 헐려버릴 것만 같은 오래된 대형 빌라 1층과 중정을 멋스럽게 개조한 야외 바에는 부다페스트의 인싸들이 다 몰려있는 것 같았다. 잠시였지만 이쉬트반을 의심했던 나는 미안한 마음에 얼굴이 달아 올랐다.
시원한 맥주를 홀짝이며 그의 사진 얘기에 살짝 과장되게 맞장구를 쳐주다 보니 금새 맥주가 바닥났다. 눈을 반짝이는 나에게 자기 작품을 구경하러 오라며 쪽지에 웹사이트 주소 하나를 적어줬다. 흥이 올라 한 병 더를 외치는 이쉬트반을 이른 아침 비행기를 핑계로 잘 달랬다. 호텔 정문까지 나를 바래다 준 그는 점잖게 굿바이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방으로 올라가 얼른 주머니 속 쪽지를 꺼내 여행 노트 사이에 꽂아 두었다. 뭔가 기분이 묘했다. 운이 좋은 날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타고난 호기심과 약간의 무모함 덕분에 간간히 예상 밖의 재미난 일을 경험하며 살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 호기심과 무모함이 어설픈 예측과 짐작으로 형태를 바꾸는 일이 잦아졌다. 그래서인가...낯선 나라에서 낯선 남자를 혼자서 따라 나서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았지만 여전히 내 어설픈 예측과 짐작을 빗겨가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데도 말이다. 더 이상 무모하기는 어렵겠지만, 내 눈을 반짝이게 해주던 호기심은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그렇게 겁 없는 한 때를 보냈던 부다페스트, 도심재개발이 진작에 마무리되었을 오래되고 무뚝뚝했던 부다페스트의 새로운 모습을 확인하러 가야겠다. 리버티 브릿지도 여유롭게 걸어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