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부터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로망이 하나 있었다. 해외에서 근무지를 옮겨가며 일하는 남편을 따라 해외 여러 도시에서 살아보는 것이었다.
낯선 도시에서 짧게 기약된 이방인으로 일상의 무게는 절반 정도 내려놓고...
내 지인들에게는 이런 기회가 드물지 않게 찾아왔지만, 기본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나에게는 그건 그냥 로망일 뿐이었다. 내 인생에 그건 찾아오지 않는 행운인가 보다 포기할 즈음, 나에게도 비슷한 기회가 찾아왔다.
회사의 Regional Office에서 진행하는 글로벌 프로젝트를 도와주기 위해 홍콩으로 3개월간 파견근무를 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홍콩이라...
나는 홍콩에 대한 어떤 판타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2006년 그러니까 벌써 까마득히 옛날 회사업무로 두 번 다녀온게 전부였고, 그때는 안고 간 업무에 치여 느긋하게 그 도시를 둘러볼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저 홍콩은 높은 빌딩들이 빼곡히 들어차 숨막히는 숲을 이루고, 그 건물 창 여기저기에 당황스럽게 나부끼고 있던 고단한 생활의 흔적들, 어딜가도 미어터지는 인파, 비싸지만 말도 안되게 작은 호텔방...그 정도였다. 쇼핑에 큰 흥미가 있지도 않았으니 홍콩은 그저 내 출장지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니, 이 홍콩 파견근무는 잠시 일상에서의 도피 외에는 사실 큰 매력이 있지는 않았다.
겨우 3개월 떠나 있을 거면서, 나는 참 살뜰히도 여기저기 작별인사를 했다. 아마 3개월 간의 부재를 알리는 내 인사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오랜 공백의 암시가 풍겼으리라... 아마도 마음 속으로는 좀 오래도록 익숙한 일상의 공간을 벗어나 있고 싶었을 게다.
3개월. 짐을 꾸리기에 참 애매한 기간이었다.
떠나는 날짜가 8월 말이니 홍콩에 있는 동안 계절이 한번 바뀔 터였다. 덩달아 챙겨야할 것들이 늘어났다. 두 계절을 버틸 수 있는 옷가지들을 단촐하게 꾸렸고, 그 동안 쌓아두기만 했던 신간도서들. 나는 여전히 종이책을 고집한다. 읽는 동안 내 손때를 묻히고, 파랑색 색연필을 들고 군데 군데 줄도 그어가며 온전히 내것으로 만들어가는 그 재미를 포기할 수가 없다. 그리고 향수병을 달래줄 먹거리. 분명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내가 끓인 된장찌개’도 몹시 그리울 것이므로 기본적인 재료들은 가져가야 했다. 캐리어 가방 2개, 국제특송으로부쳐질 5~8kg 박스 3개로 짐이 꾸려졌다.
출발하기 전날 친구에게 선물받은 미니 약상자 ‘Survival Kit in HK’까지 챙겨넣고 나니, 준비는 끝났다.
나 정말 홍콩에서 ‘Survive’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