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부터 갑자기 비가 거세게 쏟아졌다 그치기를 반복하더니 태풍경보 NO.3이 떴다.
더 거세게 쏟아지면 NO.3에서 바로 NO.8로 올라가고, 그런 경우엔 집에서 꼼짝 않고 있어야 된다고 했다. 괜히 어슬렁거리고 다녔다간 폭풍에 휩쓸려 날아오는 무언가에 봉변 당하기 쉽상이라고. 물론 회사출근도 안하고, 가게들도 문을 닫기 때문에 집 냉장고가 텅비어 있어도 곤란하다고 했다.
오래전부터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기를 그만둔 내가 여분의 우산을 회사에 두고 다니는 센스가 있을리 만무하고, 그런 습성은 환경이 바뀐다고 해서 쉽게 바뀌진 않는데... 다행히 예쁜 팀동료 Beverly의 초소형 3단 우산을 빌려들고 Times Square City Super에서 잔뜩 장을 봤다. 차곡차곡 봉지에 담아들고서야 떠올랐다. 난 뚜벅이라는 현실이...비바람까지 몰아치는데.
여리디 여린 초소형 3단 우산이 꺼꾸로 뒤집히기를 수차례, 간신히 집에는 도착했는데...어쩌나 Beverly의 핑크색 우산이 너덜너덜 험한 꼴이 되어 버렸다. 장봐온 것들을 풀어놓으니 이것도 가관이다.
신라면, 해표김, 청정원 스팸, 종갓집 김치, 그리고 한국 반찬하고 비슷한 일본 반찬 두어 가지. 타국생활 보름만에 한국에선 거들떠 보지도 않던 각종 인스턴트 음식을 비싼 가격에 정성껏 모시고 오다니. 게다가 젓가락, 플라스틱 찬통...말도 안되게 비싼 월세에 어울리지 않는 말도 안되게 소박한 부엌. 덕분에 오랫만에 플라스틱 찬통을 식탁에 올리게 됐다.
햇반이 떨어졌으니 풀풀 날리는 안남미로 생전 처음으로 냄비밥도 하고. 40분 동안 물을 3번이나 더부어 가며 겨우 쌀을 익혔는데... 아쉬운 대로 먹을 만하게는 됐다. 어떻게든 살아지는구나...
다행히도 서울서 보낸 택배가 도착했다. 옷가지와 함께 딸려 온 햇반, 캔반찬, 된장...어찌됐든 텅빈 냉장고에 한국 음식이 채워지고, 계란 터트려 넣은 신라면으로 배도 채우고 나니 다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책 집어들고 누워 바라본 홍콩섬의 야경은 평소와 다른 게 없는데...바람소리가 심상치 않다. 결국 NO.8이 떴다. 바람소리, 음악소리와 함께 늦게까지 깨어있을 것 같은 밤. 지루해질 틈이 없는 Hong Kong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