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꾀꼬리는 푸른 가지에, 제비는 날개 짓에...

봄은 스스로를 태워 빛이 되고, 그 빛은 그림자로 스며든다.

by 월하시정

제비는 날개 짓에 무게가 실려
푸른 하늘을 그리던 날이 멀어지고,
꾀꼬리는 푸른 가지에 기대어
울음소리를 늦추고있다.

초여름의 태양이 퍼붓는 빛 아래, 잎은 짙은 녹음으로 숨죽이고 홀로 남은 꽃은 붉은 자락을 내려놓는다.

봄은 스스로를 태워 빛이 되고,
그 빛은 그림자로 스며든다.

우리가 사랑한 모든 순간은 어느새 그늘에 묻혀 꿈속으로 흩어지는데-


* 봄빛의 노래 *

꾀꼬리 우는 소리 먼곳에 스며들고
鶯聲遠入蒼空裏

제비 날개 저문 빛 구름에 기우네
燕翅晩映彩雲間

붉은 꽃 지고 푸른 잎 우거지거든
紅盡綠陰方茂密

봄빛 아쉬움도 여름이 되어 흩날리네
春恨還作夏風散

잎사귀가 빼곡해진 나무 아래 앉아 허공을 보니,
신흠의 한시가 귓가에 맴돈다.

*백 년 인생도 꿈일 뿐이니,
세상 모든 일이 나에게 무슨 의미인가?*

그의 말처럼 찬란했던 봄은 이미 잠의 반쪽이 되어 버렸다. 꽃은 피어남과 동시에 시들음을 품고, 우리는 아름다움을 보며 동시에 이별을 연습한다.

허나 어찌 영원함을 바라겠는가.

계절은 스스로 빛을 다하면 저물고, 그 자리엔 새로운 빛이 깃든다.

* 초하(初夏)를 노래하며*


鶯老燕去晝漸長
꾀꼬리 늙고 제비 떠나니
낮이 점차 길어지고

綠陰紅殘夏始彰
푸른 그늘에 붉은 꽃 이지러져
여름이 비로소 드러나네

百年如夢何須歎
백 년이 꿈과 같다니
어찌 탄식하리오

且看新蟬鳴高楊
차라리 새 매미 높은 버드나무에서 우는 것 보리라

꿈속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직도 손끝으로 따스함을 전히는데, 깨어나 메모장에 적어둔 문장들은 실루엣이 되어 종이 위를 맴돌다가,
어느새 시가 되어 입가에 맺힌다.

“꿈에서 좋았던 걸로 충분했다”는 문장처럼,
지나간 계절도 그렇게 머물다 간 빛으로 충분하다.

허망함은 빛의 뒤편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지만,
우리는 오늘을 살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여름바람이 휘날리는 길 위를 걸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내일의 그늘도
오늘의 빛이 될 것이라네.

*시절의 궤적*

꽃잎이 떨어져

강물에 새겨진 봄의 서명은 흐르고
나뭇잎이 파문을 가르면 여름이 된다

꿈의 잔해를 주워 담은 내 그릇엔

계절의 파편이 반짝인다

한 조각을 들어 빛에 비추니
그 안에 온 세상이 잠들어 있었다


잠든 세상도 깨어나 다시 꿈꾸리라.


초록이 점령한 숲속 길을 걷노라면, 발밑에선 지난 계절의 꽃가루가 살짝씩 일어난다. 그것들은 공중에서 빛의 입맞춤을 받고는조용히 땅으로 돌아간다.

신흠이 탄식한 ‘백 년의 꿈’도 어쩌면 이런 것이리라. 모든 것이 사라져도 그 자리엔 흔적이 남고, 흔적은 새로운 생명의 밑동이 된다.


여름이 오면 봄은 추억이 되지만 동시에 여름은 봄이 남긴 열매를 품에 안는다.

꾀꼬리 소리를 듣고 ​
시골집에 오디 익고
보리는 여물려 하고
푸른 나무에 꾀꼬리 울음
처음 듣는다.​

꽃을 좋아하는 서울 나그네를 알아보는 듯
은근히 자꾸 지저귀며 그칠 줄을 모른다.
임 춘

꾀꼬리와 제비의 자리가 고요해진 하늘에는 매미 소리가 메아리친다. 지나간 것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다가올 것에 대한 기대가 발걸음을 가볍게 만든다.

어제의 꿈이 오늘의 시가 되듯,
오늘의 빛은 내일의 그림자가
될 테니—

우리는 계절의 고리를 이어가며 살아간다. 끝없이 이어지는 시절의 노래 속에서, 허무함은 어느새 감사의 숨결로 변해 있다.

시절이 빛을 다하면
또 다른 시절이 반기리라 ,

웃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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