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인도하는 내적 여정과 발견의 기록!
산책로는 마르고 젖은 낙엽들 위로 이어져 있었다. 발밑에서 스치는 부스럭거림은 고요한 숲속에 울려 퍼지는 유일한 사운드트랙이었다.
나는 출발점에 섰다.
목적지는 없었다.
오직 바람이 불어가는 쪽으로, 숲이 열어주는 길로, 발이 가는 대로였다. 이것이 나의 지도다. 종이도, 픽셀도, 좌표도 아닌,
살아 숨 쉬는 바람이 그리는 무형의내비게이션. '바람의 지도'를 펼치고, 시간이라는 종이 위에 내 발자국을 새기기 시작했다.
1. 길 잃음의 미학*
첫 발걸음은 어색했다.
목표와 속도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걸음은 자연의 리듬과 어울리지 않았다. 가파른 오르막에 숨이 차고, 갑작스러운 내리막에 발이 꼬였다. 지도를 펼쳐 보려는 습관적인 손길이 허공을 헤맸다.
스마트폰 지도 앱은 이곳에서 '신호 없음'을 외쳤다. 당황스러움 대신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진정으로 '길을 잃었다'. 그리고 그 순간, 비로소 길을 찾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라오쯔는 말하지 않았던가.
*"잃어버린 자가 온 천하를 얻는다"*고.
길을 잃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발견의 서곡이었다.
*風之圖 (풍지도)*
바람 이끄니 무형의 길 열리고
잎 떨어지니 소리 내는 책이로다
걸음은 마음 가는 바를 따르니
어느 곳이 돌아갈 허(墟, 텅 빈 마을) 아니리오
風引無形路 (풍인무형로) -
葉落有聲書 (엽낙유성서) -
步隨心所向 (보수심소향) -
何處不歸墟 (하처불귀허) -
월하시정
2. 숲속의 교향곡과 침묵의 화음*
소나무 숲을 지날 때였다. 위에서부터 스르륵, 스윽, 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높은 가지 사이로 스치는 바람이, 바늘 같은 잎들을 현악기처럼 문지르고 있었다.
그것은 규칙적이지 않았지만, 절대 불협화음이 아니었다. 바람의 강약에 따라, 나무의 높이와 굵기에 따라, 잎의 밀도에 따라 무한한 변주를 만들어 내는 자연의 즉흥 연주회였다. 그 옆에서는 참나무가 우뚝 서서, 단단한 잎으로 바람의 손길을 단단히 막아내며 저음을 깔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귀를 열었다. 숲은 더 이상 정적의 공간이 아니었다. 바람이라는 지휘자가 이끄는 생명체들의 대합창이었다.
그 소음(騷音) 속에서,
오히려 깊은 평온을 만났다. 소로우는 월든 호숫가에서 들었던 그 '우주의 박동'을 이렇게나 생생하게 느꼈을까.
잠시 후, 바람이 멈추었다. 갑작스러운 침묵이 숲을 덮쳤다. 그 순간, 그전까지 들리지 않았던 소리들이 튀어나왔다.
먼 곳에서 들리는 딱따구리의 두드림, 흙 속에서 뭔가 기어가는 미세한 소리, 내 자신의 심장 박동과 호흡 소리까지.
침묵은 소리의 부재가 아니라, 다른 소리들을 위한 무대였다. 바람의 지도는 이렇게 나에게 들리지 않는 것들을 듣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3. 바다 앞에서의 미시적 우주*
숲길을 벗어나 해안 절벽에 섰다. 눈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 저 멀리 수평선은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거대함에 압도되어 숨이 막힐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발밑을 주목하게 되었다. 절벽 가장자리 틈새에, 조그만 분홍 꽃 한 송이가 고개를 내밀고 바람에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파도 소리와 바람의 포효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그 작은 생명체.
그 순간, 거대한 바다와 미세한
꽃 하나가 마음속에서 만났다.
둘 다 똑같이 경이로웠다.
우주는 별들의 춤사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 송이 들꽃의 생명력 속에도, 한 방울 바닷물의 소금기 속에도 온 우주가 응축되어 있었다.
내 안에도 그런 미시적 우주가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 바람의 노트 *
바람이 지도 삼아 내 손에
쥐어준 휘발성 종이 한 장
그 위엔 구름으로 쓴 상형문자
나뭇가지로 그린 곡선
나는 발끝으로 따라 그리며
시간의 여백을 채워갔네
길 잃은 만큼 마음의 좌표가 선명해지고 멈춘 자리에서 세계가 말을 걸어왔네
지도는 결국 사라져도
발바닥에 새겨진 풍경의 각인
귓가에 맴도는 바람의 속삭임
그것이 진짜 나침반이 되리
월하시정
4. 내면의 바람을 따라*
여정 중 가장 힘든 순간은 예상치 못한 갈림길이었다. 오른쪽은 평탄하고 편안해 보이는 길, 왼쪽은 가파르고 험해 보이지만 멀리서 바다 빛이 스치는 길.
이성은 오른쪽을, 어떤 알 수 없는 끌림은 왼쪽을 가리켰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현명한 선택은? 효율적인 선택은?
그런 질문들이 머리를 스쳤다. 그때, 가슴 한켠에서 살짝 불어오는 미풍을 느꼈다.
그것은 외부의 바람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 불어오는 것이었다. 그 바람은 분명히 왼쪽 길을 향해 살며시 나를 밀었다.
이성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그 내면의 바람을 따라 왼쪽 길을 선택했다. 등산로는 정말 험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정상에 다다랐을 때 펼쳐진 광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붉은 노을에 물든 바다와 하늘이 하나 되어, 마치 불타는 듯한 장관이었다. 그 선택의 순간, 나는 바람의 지도가 단순히 외부의 방향만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 존재하는 '진정한 나'를 향한 나침반임을 깨달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의 고유한 박자를 따라 걷지 않는 자는, 아무리 다른 소리를 들을지라도, 자신의 음악을 결코 듣지 못할 것이다."*
5. 발자국 없는 길*
어느 날 오솔길을 걷다가, 갑자기 숲속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는 작은 길을 발견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풀과 나뭇가지들이 제멋대로 자라 길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갈까, 말까?' 주저하는 순간,
이순신 장군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바람아 부디 먼지를 일으키지 말아라 /
나그네의 눈을 흐리게 하지 말아라."*
(風塵莫起行人眼 - 풍진막기행인안).
여기서 '바람'은 외부의 풍진(風塵)이기도 하지만, 마음속의 동요이기도 하다.
나는 마음속의 '풍진'을 가라앉히고, 그 발자국 없는 길로 들어섰다.
발밑에 풀들이 스치는 소리, 나뭇가지가 옷깃을 스치는 감촉이 생생했다.
그 길은 결국 큰 길과 다시 만났지만, 그 짧은 탐험은 나에게 '정체된 길'보다 '새로운 길'의 가치를 일깨워주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유명한 시구처럼, *"발자국 없는 길을 택했고, 그것이 모든 차이를 만들었다."*
그 차이는 세상을 바꾸는 큰 차이가 아니라, 내 하루를 빛나게 하는 작은 기적이었다.
숲속의 새들이 내 갑작스런 등장에 놀라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미안해, 친구들. 오늘만은 이 무단침입자를 봐줘!"
6. 귀환, 그리고 새로운 출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발걸음이 무거웠다.
몸은 피로했지만, 마음은 가볍고 맑아져 있었다. 바람의 지도로 걷는 시간은 단순한 외부의 산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면의 풍경을 탐사하는 여정이었다. 나무와 바람, 새소리와 바다의 속삭임은 모두
내 안에 잠든 목소리들을 깨우는 도구였다.
자연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자, 가장 세심한 심리치료사였다.
그 앞에서는 모든 말장난과 논리가 무색해졌다. 그저 존재하는 것,
그 자체로 완전한 교훈이었다.
문득 옛 시인 이백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났다.
*"흰 구름은 웃음짓고
나그네는 스스로 한가롭도다"
(白雲笑語 客自閒 -
백운소어 객자한).*
나는 구름처럼 한가롭게 웃을 수 있는
나그네가 되고 싶었다.
바람의 지도는 결국
'지금, 이 순간'을 향해 있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걷는 그 과정 자체가 목적임을 일깨워주는 지도.
그 지도는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매일 매순간 바람이 새로운 경로를 그리며,
나는 그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그 발자국이 다시 지도의 일부가 될 테니까.
내일도 나는 바람의 지도를 펼칠 것이다. 어디로 인도할지 모르는 그 무형의 길을,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으로, 서두름보다 여유로, 목적보다는 과정으로 걷기 위해.
바람이 부는 곳에 길이 있고,
길이 있는 곳에 발견이 있으며,
발견이 있는 곳에 나 자신이 있으리라.
"가장 아름다운 길은 발자국 없는 길이다. 가장 깊은 발견은 예상치 못한 길잃음 속에 있다.
바람은 지도가 아니라,
길을 걷는 용기를 내는 법을 가르치는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