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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 뒤의 고요

모든 것은 스스로 자리 잡는다.

by 월하시정

소나기는 불청객이다.

예고 없이 밀려와 하늘과 땅의 경계를 흐리며, 세상을 낯선 수증기의 세계로 던져놓는다.

굵은 빗줄기는 초연한 태도로 처마를 두드리고, 아스팔트를 때리며, 잎새를 휘청거리게 만든다.


그 소음은 세상의 모든 다른 소리를 삼켜버리는 포악함을 지닌다.
마치 우주의 숨이 가빠진 순간, 질서라는 허울을 벗어 던진 채 무질서의 춤을 추는 것 같다.

그러나 그 격렬함은 언제나 생각보다 빨리 물러간다. 마지막 한 방울이 처마 끝에서 맴돌다 떨어지는 순간, 소나기가 남긴 것은 축축한 흙냄새와, 쏟아져 내렸던 빛깔을 모두 씻어낸 듯 선명한 풍경, 그리고… 깊고 깊은 고요다.

* * *

비가 그친 직후의 공기는 특별하다. 축축하지만 답답하지 않고, 오히려 가볍고 투명하다. 마치 세상이 커다란 스펀지로 물기를 빨아들인 뒤 남은 신선함 같다.

햇살이 구름 사이로 살며시 스며들기 시작하면, 빗방울이 맺힌 잎새들은 각자의 은색 보석을 들고 고개를 든다.

한 방울, 한 방울이 햇빛을 받아 반짝일 때마다, 마치 땅 위에 별들이 깔리는 듯하다. 그 순간의 빛은 더없이 순수하다. 비에 씻겨낸 티끌만큼이나 맑다.

길가의 움덩이에 고인 물은 잠시 우주의 축소판이 된다. 흐릿하게 비치는 하늘,

지나가는 구름 조각, 그리고
그 속에 비친 나의 모습까지.

발을 들여놓으면 잠깐의 혼란 뒤, 물은 다시 스스로 평정을 되찾으며 자신의 경계를 찾아간다.

모든 것이 흔들렸지만, 결국 제자리를 찾는 이 섭리. 고인 물 한 웅덩이에도 우주의 질서는 스며들어 있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이 고요 속 유일한 박자다. ‘똑… 똑…’ 그 소리는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리면서도, 오히려 정적을 더 깊게 만드는 역설을 지닌다.


각각의 물방울은 자신만의 여정을 마친 뒤 땅으로 돌아가 흙과 하나 된다. 그 과정은 단순하면서도 엄숙하다.
마치 우주의 근본적인 리듬을 상기시키는 듯하다.

소란 뒤의 이 침묵은 단순한 무음이 아니다.

모든 것이 스스로의 위치를 되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의 소리 없는 노래다.

* * *

잔잔한 물웅덩을 피해 행군하는 개미 한 마리.

비에 잠시 갇혀 있던 지렁이
한 마리가 축축한 흙 위로 기어 나온다. 나뭇가지에 앉은 참새 한 마리가 날개를 털며 물기를 날린다. 생명들은 잠시 숨었던 굴에서 나와, 다시금 자신의 일상을 재개한다.

그 움직임들은 서두르지도, 망설이지도 않는다. 그저 각자의 본능과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마치 비가 잠시 멈춘 틈을 타 무대 위로 올라온 배우들처럼, 그러나 그들의 연기는 리허설 없이 즉흥적으로 펼쳐진다.

그 즉흥 속에 오히려 완벽한 질서가 숨어 있다.
개미는 길을 찾고, 지렁이는 흙속으로 돌아가고, 참새는 하늘을 날아간다.

각자 제 갈 길을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소나기 뒤 고요가 보여주는 우주적 질서의 핵심이다.

"모든 것은 스스로 자리 잡는다."

이 문장은 소나기 뒤의 고요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다가온다. 격변 뒤에는 반드시 평정이 찾아오고, 흩어진 것들은 제 위치를 되찾는다.

하늘은 다시 높아지고,
땅은 물기를 스며들게 하며, 생명들은 각자의 길을 간다.

이 질서는 누군가가 강제로 만든 것이 아니다. 우주 그 자체가 지닌 본연의 리듬, 스스로 균형을 찾아가는 내재적 힘이다.

철학자들은 이를 ‘우주의 자기 조직화’라 부를지도 모르겠다. 혼란은 질서를 위한 필수적인 전주곡일 뿐이다. 소나기의 난장판은 오히려 세상을 더 선명하게, 더 생생하게 만드는 정화의 과정이다.

그 뒤에 찾아오는 고요는
그 정화가 완성되었음을 알리는 침묵의 선언이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미처 알지 못했던 작은 아름다움들

– 잎새 끝의 반짝이는 물방울,

축축한 흙의 깊은 냄새,
구름 걷힌 하늘의 푸르름 – 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들은 평소에는 일상의 먼지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것들이다.

* * *

이 고요는 영원하지 않다. 그 덧없음 속에

오히려 애상적인 아름다움이 스민다.
잠시 후면 바람이 일고,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하며, 길거리에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다시 들려올 것이다.

그 고요는 우주가 잠시 내민 작은 미소와도 같다. 깊고도 신비로운, 그러나 곧 사라질 미소.

그 순간을 포착하지 못하면 영원히 놓쳐버릴 수 있는 소중한 순간이다.

때로 우리 인생도 소나기와 같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시련과 혼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순간들.

그 소란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비의 소음만이 귀를 때릴 뿐이다.

그러나 그 소나기 또한 지나간다.

비가 그치고 고요가 찾아오면, 우리 역시 스스로 자리를 잡아간다. 상처는 아물고, 흩어진 마음은 모이고, 혼란은 새로운 질서로 정리된다.

비로 씻겨 나간 것들은 애석하지만,

동시에 더 단단하고 선명해진 무엇인가를 남긴다.

소나기 뒤의 고요는 단순히 비가 그쳤음을 알리는 신호가 아니라, 삶의 파동 속에서도 근본적인 질서가 존재함을, 그리고 모든 상처와 혼란 뒤에는 새로운 안정이 기다리고 있음을 은유한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게 갠 하늘. 아까까지 그곳에서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요하고 평온하다.

그 하늘 아래 서서, 축축한 흙냄새를 들이마시며,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똑… 똑…’ 그 소리는 지금
이 순간, 우주가 스스로를 정리하며 내는 숨소리다.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이 깊은 고요 속에서,
모든 것 – 하늘과 땅, 빗방울과 흙,

나뭇잎과 개미,
그리고 나 자신까지 –

이 저마다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음을.

그저 그 질서의 흐름에 맡기면 된다.

모든 것은 스스로 자리 잡는다.

그저 이 고요를,
이 우주적 질서의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소나기는 지나갔고,
고요가 내려앉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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