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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향해 고개 숙인 해바라기

고개 숙임에는 우주를 향한 깊은 경의와 겸손의 미학이 스며들어 있다.

by 월하시정

겸손의 경외

정원 한켠에 서 있는 해바라기 군락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우주적 질서 앞에 선

한 무리의 경건한 수행자들이 떠오른다.


높이 쭉 뻗은 줄기 끝에 매달린 커다란 황금 접시들은, 한결같이 태양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단순히 생존을 위한 기계적 반응을 넘어,

이 고개 숙임에는 우주를 향한 깊은 경의와 겸손의 미학이 스며들어 있다.


"해동(海東)에 반일화(向日葵) 피어 있으니 /

海東葵花向日開*

아침 이슬 맺혀 황금빛 찬란하네 /

朝露團團金盞臺*

고개 숙여 하늘 법도 공경하니 /

俯仰天心敬法度*

어찌 교만한 마음 감히 생기랴 /

敢生驕慢一點哉"*

(해바라기를 보고 - 작자 미상)


이 오래된 한시는 해바라기의 자세를 단순한 생태 현상이 아닌,

우주적 질서(‘천심天心’과 ‘법도法度’)에

대한 경외의 표현으로 읽어낸다.


‘감히 교만한 마음 조금이라도 생기겠는가’라는 마지막 구절은 강렬하다. 해바라기의 고개 숙임이 본질적으로는 ‘교만’에 대한 부정이며, 겸손 그 자체의 선언임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과학의 눈으로 보면 이 고개 숙임은 ‘광굴성(光屈性)’이라는 놀라운 생명 현상이다.

해바라기의 어린 꽃봉오리와 잎에는 ‘옥신’이라는 호르몬이 분포한다.

빛은 이 옥신의 농도를 불균형하게 만든다.


빛이 비치지 않는 쪽의 세포들이 더 빨리 자라나면서, 식물체 전체가 자연스럽게 광원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것이다.


해바라기는 동트는 태양을 향해 동쪽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태양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동안, 그 커다란 꽃받침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도 끊임없이 각도를 조정하며 정확히 태양을 추적한다.


서쪽 하늘에 태양이 지면, 해바라기는 다시 동쪽을 향해 머리를 돌려 다음날의 태양 출현을 준비한다. 이 과정에서 해바라기의 경추(목에 해당하는 부분)는 매일 거의 90도에 가까운 각도로 유연하게 회전한다.

이 놀라운 움직임은 식물계의 ‘요가 마스터’라 불러도 손색없을 만큼 유연하고 절제된 것이다.


태양의 화신(化身)이여,

황금의 관(冠)을 쓰고,

침묵의 시선으로 하늘을 읽는다.


한 뼘,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경건한 각도(角度)의 예술가.


밤이면 고개 돌려

동쪽을 향해 무게중심을 잡으니,

내일의 빛을 향한 준비 또한

지금의 경배(敬拜)와 다르지 않으리.

월하시정


그러나 이 경이로운 추적은 영원하지 않다. 해바라기의 꽃이 완전히 피고, 씨앗을 맺기 시작하는 성숙기에 접어들면, 그 유연했던 경추는 굳어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대개 동쪽을 고정하여 바라보게 된다.


이는 단순히 노화가 아니라,

생의 다음 단계로의 전환이다. 에너지를 빛을 쫓는 데 쓰기보다, 이미 확보한 빛(동쪽의 아침햇살)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해 소중한 씨앗을 완성하는 데 집중하기 위한 전략이다.


젊은 날의 활발한 추구에서 성숙한 경지의 집중과 결실로의 전환, 이 또한 자연이 가르치는 지혜의 한 단면이다.


인간의 눈에 비친 해바라기의 ‘고개 숙임’은 종종 ‘복종’이나 ‘의존’의 상징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오히려 강인한 생명력과 적극적인 생존 전략이 깃들어 있다.


해바라기는 태양을 ‘우러러보며’ 동시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 고개 숙임은 결코 나약함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과 번성에 꼭 필요한 에너지원인 태양에 대한 지극히 실용적이면서도 경건한 대응이다.


진정한 겸손이란 자신의 위치와 필요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에 합당하게 행동하는 데서 나오는 내적 힘이다. 마치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잎사귀를 흔들지만 뿌리는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인간 사회를 돌아보자.

우리는 종종 지식의 깊이보다는 높이 치솟은 목소리, 진정성보다는 자신을 내세우는 외피에 더 쉽게 현혹되곤 한다. 해바라기가 보여주는 겸손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태양이라는 거대한 존재와 가장 효과적으로 소통하는 지혜다.


‘햇빛을 쫓는’ 해바라기의 모습은 때로는 지나친 집착이나 단순함의 상징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해바라기처럼 고개만 숙이고 따라가다간

목 디스크 오겠네”라는 농담 섞인 위트는, 오히려 우리가 진정한 ‘방향’과 ‘가치’에 대한 성찰 없이 맹목적으로 따라다니는 현대 생활을 풍자하는 듯하다.


해바라기는 태양이라는 명백한 생명의 근원을 향해 고개 숙이지만, 우리는 과연 무엇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가?


해질 무렵, 정원의 해바라기들을 다시 보노라면 놀라운 장면이 펼쳐진다. 서쪽으로 기울어졌던 커다란 꽃들이,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 빛을 받아 잠시 고개를 쳐들었다가, 다시 천천히 동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기 시작한다. 이 순간의 움직임은 특히 감동적이다.


하루를 마감하며 태양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인사처럼, 또는 내일의 빛을 기다리는 준비의 몸짓처럼 보인다. 그 고개 들었다 숙이는 순간, 경건함과 기대감이 교차한다. 마치 수행자가 하루의 명상을 마치며 깊이 경배하는 모습과도 같다.


해바라기의 고개 숙임은 단순한 생물학적 반응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의 거대한 에너지원 앞에서 취하는 가장 지혜로운 자세다.

생명을 지속시키는 근원에 대한 경외, 자연의 법칙에 대한 순응,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최선으로 꽃피우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담긴 미학이다.


그 겸손한 고개 숙임 속에는 오히려 생명의 위대함과 강인함이 응축되어 있다.

태양을 향해 고개 숙인 해바라기를 바라보며, 우리도 자신의 삶 속에서 진정으로 경배하고, 감사하며,

겸손히 마주해야 할 ‘태양’이 무엇인지 성찰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그 태양은 명예일 수도,

사랑일 수도,

진리일 수도,

또는 그 자체로 경이로운 생명의 순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해바라기는 말없이 가르친다.

진정한 강함은 고개 숙이는 법을 아는 데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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