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오의 등롱처럼 인간은 덧없는 빛을 붙잡아 형체를
덧없음이 남긴 빛!
여름밤 늪가를 걷노라니,
갑자기 어둠 속에 반짝이는 빛들이 나타났다.
한 점, 두 점, 스러지면 다시 피어나며 공중을 유영한다.
반딧불이다.
이 작은 생명은 그 빛으로 깊은 어둠을 가르며 유영한다. 그 빛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다. 다만 부드럽고도 집요한 생명의 호흡이다.
그들은 숲의 숨결을 타고 밤을 적신다.
어둠 속에서 반딧불은 자신의 빛으로 존재를 증명한다. 그 빛은 일시적이어서 더욱 귀중하다.
어둠은 그 빛을 집어삼키려 하지만, 반딧불은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이 작은 생명은 암흑에 맞서 스스로의 빛을 내뿜으며 살아간다. 그들의 빛은 순간이지만, 그 빛이 지닌 힘은 어둠 속에 깊은 흔적을 새긴다.
영광(螢光)
초목 썩어 빛으로 변해,
밤을 밝히며 날아 다니네.
한순간의 밝음으로 어둠찢고,
덧없음이 영원함 되네.
(腐草化微光 夜飛點蒼茫 一瞬破永暗 剎那即恒長)
어둠이 깊어질수록 반딧불의 빛은 더욱 선명해진다.
그들은 공중에서 호흡하며 빛을 내뿜는다.
이 찰나의 빛은 생명 자체의 고백이다.
그 빛 아래에서 우리는 생명의 신비로움을 본다. 그들의 빛은 시간의 강물 위에 뜬 등불과 같아, 순간을 영원의 강가에 묶어두려 한다.
반딧불의 빛은 예술가들의 영감이 되어 왔다.
고대 동양 화가들은 반딧불이 그리는 빛의 궤적을 붓으로 따라가려 했고, 시인들은 그 찰나의 아름다움을 언어로 가두려 애썼다.
단오의 등롱처럼 인간은 덧없는 빛을 붙잡아 형체를 부여하고자 했다. 그러나 덧없음이 본질인 빛은 형태로 고정될 수 없다.
그 깨달음 자체가 예술이 추구하는 경지다.
이 작은 생명의 빛을 바라보노라면, 인간의 예술적 열망도 그와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쇼팽의 녹턴처럼 반짝이는 음률, 릴케가 노래한 깊은 존재의 노래, 고대 동굴 벽화 위에 스민 빛바랜 안료의 흔적까지.
이 모든 것은 잠깐 동안 타오르는 빛의 기록이다.
그 기록들은 시간을 가로질러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찰나의 불꽃들은 미완의 영광이며,
덧없음 속에서 태어나는 영원의 씨앗이다.
빛의 숨결
어둠은 깊고 깊어도
반딧불은 쉬지 않고 숨 쉰다.
한 점 빛이 스러지면
다른 빛이 이어받아 피어난다.
그들의 빛은 쉼표이자 시작.
덧없음 속의 불꽃이
영원의 악보에 새겨지고 타오르는 순간마다
영원의 노래가 시작된다.
인간의 삶은 반딧불의 빛과 닮았다.
우리는 빛을 내며 잠시 존재하다 사라진다.
그러나 그 찰나의 빛은 다른 이의 어둠을 밝힐 수 있다.
인생의 무대에서 우리가 내뿜는 한 줄기 빛은 다른 영혼의 등대가 될 수 있다.
그 빛은 덧없지만,
그 덧없음이 오히려 빛의 진정한 가치를 빚어낸다. 덧없음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빛을 발견하고, 그 빛으로 서로를 인도한다.
늪가를 떠나 돌아서는 순간, 마지막 반딧불 하나가 수풀 위로 부드럽게 솟아올랐다.
그 빛은 어둠 속에 오래도록 머물다 서서히 사라졌다. 그러나 그 빛이 스러진 자리에는 여전히 따뜻한 여운이 맴돌았다.
어둠은 다시 그 자리를 채웠지만,
그 찰나의 빛은 영원히 마음속에 새겨졌다. 그것은 덧없음이 남긴 영원의 각인.
반딧불의 빛은 어둠 속의 휴지부다.
잠시 멈춤이지만, 그 멈춤이 더 큰 울림을 준다.
그 빛의 덧없음은 오히려 그 순간을 영원히 새기게 한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반짝이는 순간의 빛은 더욱 소중해진다. 그 찰나의 빛은 우리를 영원의 문턱으로 이끈다.
우리가 살아내는 순간순간이 그 찰나의 빛이다.
그 빛은 스러져도 그 열정은 다른 생명에 전해진다.
덧없음이 남긴 빛은 결국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
우리를 어둠 너머로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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