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진 자리에는 고요가 남았지만, 그 고요 속에는 세계의 모든 소리가
칠월의 무더위는 마치 녹아내리는 납덩어리 같다. 오후 내내 하늘에 박힌 백열등처럼 타오르던 해가 서서히 기운을 잃고 서쪽 하늘로 기울 때, 숨죽였던 세상이 살며시 내쉬는 한숨을 느낄 수 있다.
뜨거운 콘크리트 위로 스미는 그늘, 습기를 머금고 다가오는 미지근한 바람, 그리고 저 멀리서부터 시작되어 점점 가까워지는 **풍경소리**들이 이 시간의 주인공이다.
공원 벤치에 앉아 있노라면, 낮동안 사라졌던 생명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나뭇가지 사이로 스치는 바람이 만들어내는 속삭임은 마치 나무들이 하루의 사색을 나누는 소리다.
"슈우우욱— 샤아아악—" 그 소리는 텅 빈 공기보다 더 선명하게 공간을 채운다. 어느새 하늘은 화가가 물감통을 엎은 듯 주황과 분홍, 보라색이 뒤섞인 광경을 연출한다.
노을빛은 단순한 빛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공간 위에 남기는 부드러운 발자국이다.
"해가 지는 순간, 세상은 소리로 빛난다."
풀밭에서는 들쭉날쭉한 그림자들이 춤을 춘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마치 깨지지 않은 유리구슬들이 땅 위를 굴러다니는 듯한 맑은 소리—가 공기를 가른다.
"얼씨구!" "다시 한 번 더!" 그들의 목소리에는 아직 다 타지 않은 낮의 열기와, 다가올 밤의 신비에 대한 순수한 기대가 섞여 있다.
그 소리는 청량제처럼 마음을 시원하게 씻어내린다. 잔디 위를 달리는 작은 발걸음 소리, "두둑, 두둑," 마치 땅이 아이들과 속삭이는 비밀스러운 언어 같다.
공원 깊숙이 자리한 그네 앞에선 한 소녀가 발을 땅에 박고 있다. 그녀가 힘차게 몸을 밀어 올리는 순간, "끼이익—" 하는 사운드가 공기를 갈랐다. 그 소리는 마치 시간의 경계를 넘는 문이 열리는 소리 같았다.
올라갈 때는 숨이 탁 막히는 듯하다가,
가장 높은 곳에서 잠시 멈춘 순간—그 찰나의 고요함 속에서 세상이 잠시 숨을 죽인다.
그리고 내려오는 바람에 실려, 나뭇잎 스치는 소리와 아이들의 함성이 섞여 하나의 교향곡이 된다. 그네 체인이 흔들리며 내는 "철커덕, 철커덕" 소리는 마치 시간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 같기도 하다.
연못가에서는 개구리들이 저녁 연습을 시작한다. "개굴개굴" 하는 소리가 물결을 타고 공원 전체로 퍼져 나간다. 그 소리는 해질녘의 고정된 배경음이 된다.
어느새 수면 위로 반딧불이 한 마리가 등장한다. 아직 완전한 어둠이 아니기에 그 빛은 희미하지만, 마치 노을이 남긴 마지막 불씨가 공중을 떠다니는 듯하다. 반딧불의 등불은 소리가 아니라 빛으로 노래하는 시(詩)다.
길 건너 커피숍 테라스에서는 컵이 놓이는 소리, "똑," 은은한 대화의 웅얼거림이 바람에 실려 흘러온다. 그 소리들은 마치 잔잔한 호수 위를 스치는 바람결 같아, 듣는 이의 마음에 잔물결을 만든다. 누군가의 웃음소리—"크흐흐"—가 공중에 맴돌다 사라진다.
그 소리는 익명의 낭만이다.
이 모든 소리들 사이로, 나뭇잎들이 맞부딪히는 "솔솔" 소리가 가장 끈질기게 귓가에 맴돈다. 그것은 7월의 숨소리다.
푸르른 잎들은 해가 남긴 마지막 열기를 식히려는 듯 바람과 맞장구를 친다.
가끔은 새 한 마리가 가지 사이를 가로지르며 "짹" 하고 외친다.
그 짧은 소리는 마치 낮의 끝에 찍은 도장 같다.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는다. 노을빛이 물러간 자리에는 청자색 어스름이 깔린다.
공원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며 "딸각" 소리를 내고, 그 따뜻한 빛은 어둠 속에 작은 안식처를 만든다. 아이들의 함성은 점점 희미해지고,
대신 귀뚜라미들의 합창이 시작된다. "릇릇—" 그 소리는 어둠을 수놓는 은선(銀線)이다.
그네 타던 소녀가 마지막으로 하늘을 발로 차며 내려온다. 그녀가 땅에 발을 디딜 때, "쿵" 하는
작은 소리가 났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해질녘의 풍경소리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바람과 나뭇가지, 아이들의 발걸음, 그네 사슬, 개구리와 귀뚜라미까지—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이 거대한 자연의 악보에 한 음씩을 더한다. 그것은 혼돈이 아닌, 보이지 않는 지휘자가 있는 합주(合奏)다.
마지막으로 연못가에서 커다란 수국 한 송이가 바람에 떨어져 물에 닿았다. "풍—" 하는 아주 잔잔한 소리. 그것이 해질녘 풍경소리의 마침표였다.
어둠이 완전히 내린 공원은 이제 다른 소리들로 채워지겠지만, 칠월의 해질녘이 선사한 이 서정적 교향곡은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풍경(風景)'이라 할 때 보는 것만 생각하지만, 진정한 풍경은 **들리는 것**이다. 소리는 빛보다 더 깊이 스며든다.
바람이 귓가를 스칠 때마다,
나는 이 순간이—저 멀리서 들려오는 모든 풍경소리들이—영원히 공명하길 바란다.
해가 진 자리에는 고요가 남았지만,
그 고요 속에는 세계의 모든 소리가 스며들어 있음을, 그대도 느껴보았는가?
해가 지면 어둠이 오지만,
진정 사라지는 것은 빛뿐이다.
소리는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해져
영원의 귀를 간지럽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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