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는 이별을 알리는 아름다운 비수 같았다. 그녀는 돌아서서 방문을 열고
무작위로 끌린 기차표를 쥐고 역을 나섰다.
차창 밖으로 내리는 비는 세상을 흐릿하게 만들었고, 기차는 나를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실어 날랐다. 차창을 스치는 빗방울들은 무수히 많은, 미개봉한 편지 봉투 같았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차창에 기대어 깊은 내면의 고독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비는 내면을 적셨고, 기차는 구름처럼 무거운 회한을 이끌고 갔다.
기차는 어느 서늘한 산골 작은 역에 멈추었다. 역명판은 흐릿하게 비에 젖어 있었고, 역무원은 무심하게 깜빡이는 신호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은 내게 익숙한 이름이었다—옛날, 나와 그녀가 처음 만났던 그곳이었다.
비는 더욱 거세졌다.
차창에 흐르는 물줄기 속으로, 마치 오래된 영사기 필름처럼 그날의 기억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 * *
그날도 비가 내렸다.
우산도 없이 역 건물 처마 밑에 웅크리고 있던 젊은 나를, 그녀는 자신의 우산 아래 불쑥 끌어들였다. 그녀의 눈빛은 비에 젖은 들꽃처럼 부드러웠고, 손끝 스치는 감촉은 따스했다. 우리는 그때, 서로의 손을 잡은 채로 빗속을 걸었다.
발자국마다 물보라가 튀었고,
비가 만든 거울 속에 비친 우리 모습은 하나로 흐려지고 다시 또렷해졌다.
하지만 젊음의 순수함은 어느새 시간과 함께 스러져갔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좇아 먼 곳으로 떠나기로 했고, 나는 그녀의 기차를 배웅하며 끝내 붙잡지 못했다.
떠나는 기차의 창문 너머로 흐릿해져 가는 그녀의 얼굴은, 마치 오늘처럼 창가에 흐르는 빗물 무늬처럼 희미해져 갔다.
그날의 비는 아직도 내 마음속에 내리고 있었다.
* * *
그날의 추억에 젖어 무심코 역 플랫폼을 내려섰다. 빗속에 홀로 서 있는 사람이 하나 보였다. 낯선 듯 낯설지 않은 체구, 그리고 내리던 비에도 변하지 않은 그 부드러운 눈빛—그녀였다.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의 눈에 깃든 깊은 슬픔과 그 위에 겹겹이 쌓인 시간의 흔적은 여전히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오랜만이야.”
우리는 서로를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비에 젖은 듯 축축했고,
그녀의 눈가에는 미세한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기차가 다시 움직이기 전까지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역 근처의 오래된 여인숙으로 발길을 돌렸다. 비는 창문을 두드리며,
여인숙의 작은 방 안에는 오랜 시간이 압축되어 응결된 듯한 무거운 침묵이 가득했다.
우리는 그 침묵 속에서 서서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숨소리가 들려왔고,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나의 모습은 점점 커져 갔다.
그녀의 손끝이 내 볼을 스쳤고, 그 따스함은 오래된 상처를 녹여내는 것 같았다.
“보고 싶었어.”
그녀의 속삭임이 내 귓전에 닿았다.
그녀의 입술이 만져졌다. 그녀의 숨결이 나의 숨결과 뒤엉켰다. 모든 억제된 욕망과 그리움, 그리고 쌓이고 쌓인 시간의 무게가 그 순간 화산처럼 분출했다.
우리의 몸은 마치 서로의 아픔과 그리움을 말없이 나누고 치유하려는 것처럼 격렬하게 얽혔다. 그녀의 온기가 나를 감쌌고, 그녀의 몸짓은 나를 깊이 끌어당겼다. 우리는 서로에게 깊숙이 파고들어, 그 오랜 시간의 틈새를 채우려 했다. 밤은 깊어갔고, 빗소리는 욕망의 박자에 맞춰 점점 거세졌다.
우리는 서로의 피부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을 더듬으며, 잃어버린 세월을 한순간에 불태우려는 듯 달아올랐다. 창밖의 빗소리는 점점 커져 우리의 숨소리와 몸부림을 삼켜버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등에 깊숙이 파고들며, 나는 그녀의 입술에서 맛본 슬픔과 단맛을 삼켰다. 우리의 몸은 격정적으로 얽히고설키며, 오랜 고독과 갈증을 서로의 체온으로 채우려 애썼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번뜩이는 눈빛은 열정과 슬픔이 교차하는 강물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깊이 파고들어, 잃어버린 모든 순간들을 한밤중에 되찾으려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우리는 오직 서로의 숨결과 심장소리만이 존재하는 우주 속에 홀로 남겨진 것 같았다.
날이 밝기 직전,
그녀는 옷깃을 여미며 창가에 기대어 앉았다. 그녀의 어깨선은 새벽 어스름 속에서 고요하고도 슬픈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작은 노트를 꺼내 한 장을 뜯어
내 손에 쥐어주었다.
*빗속의 시편*
빗속 기차표, 목적지 없이 떠도는
젖은 차창에 번지는 네 모습
오래된 역에서 만난 우산 아래
손끝에 남은 온기, 녹슨 추억
밤의 침묵을 가르는 숨소리
두 몸, 한 상처에 스며드는
피부에 새긴 시간의 주름
서로의 깊은 상처 위에 핀 꽃
잠깐의 정거장, 영원의 무게
기적음에 깨어난 새벽
빗방울이 씻어내린 자리
텅 빈 선로 위로 햇살이 스며든다
그녀는 시를 쓴 쪽지를 내 손에 쥐여준 후,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깊은 슬픔과 다짐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잊지 마. 하지만 다시는 기다리지 마.”
그녀의 목소리는 고요했지만 무거운 결정이 깔려 있었다. 그녀는 나를 향해 마지막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는 이별을 알리는 아름다운 비수 같았다. 그녀는 돌아서서 방문을 열고, 비가 그친 새벽 공기 속으로 사라져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방 안에 고요한 메아리로 남았다.
나는 그녀가 남긴 시편을 꼭 쥔 채,
그녀가 사라진 문 너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 인생의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뒤, 이렇게 고요히 넘겨버린 것이다.
* * *
그녀가 떠난 직후,
밤새 내리던 빗줄기는 갑자기 가늘어지더니 마침내 그쳤다. 짙은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고, 창문 틈 사이로 희미한 아침 빛이 스며들었다. 나는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비가 그친 후의 공기는 씻은 듯 맑고 상쾌했고, 먼 산봉우리에는 희미한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빗방울이 잎사귀 끝에 맺혀 햇살에 반짝였다. 여인숙 아래에서 기적 소리가 울려 퍼졌다.
떠날 시간이었다.
나는 기차에 올라 그녀가 앉았던 빈자리를 마주하고 앉았다. 햇살은 그 빈 자리를 온전히 채우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빗물에 씻겨 생생하게 빛났다.
기차는 새로이 개척된 선로를 따라 달렸다.
내 손에 쥔 그녀의 시편은 살짝 구겨져 있었지만, 그 글자들은 햇살 아래 더욱 선명했다.
나는 그 시를 다시 한 번 속으로 읽었다.
그녀의 목소리, 체온, 밤의 숨소리—모든 것이 아직 내 피부에 생생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것이 마치 먼 꿈속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떠난 빈 자리가 내게 남긴 것은 고통스러운 공허함이 아니라, 오히려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맑은 감정이었다.
밤새의 열정과 이별의 아픔은 마치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쌓인 더러운 것들을 씻어낸 것 같았다. 비가 갠 뒤의 하늘처럼 가슴이 맑아졌다.
기차는 계속 달렸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들판은 빗물로 씻긴 후 더욱 선명하고 생기 넘쳤다. 나는 그녀가 남긴 시편을 차창 틈에 살며시 끼웠다. 종이 한 장이 흔들리는 바람에 살랑살랑 춤추다가, 결국 차창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나는 그녀와의 모든 기억들이 그렇게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기억들은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비가 갠 후의 공기처럼 깨끗하고 가벼웠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비가 갠 뒤의 상쾌한 공기가 내 얼굴을 스쳤다. 그리고 나는 깊게,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속에 오래도록 맴돌던 무언가가 그 숨과 함께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 자리에 맑은 빛이 들어왔다.
기차는 빛나는 선로를 따라,
알 수 없는 미래로 계속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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