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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수평으로 내리고, 생각은 수직으로

빗발은 창 가로질러 짜이고, 마음 실은 벼루 깊이 떨어지네.*

by 월하시정


창밖에는 비가 수평으로 내린다. 그저 평평하게, 차갑게, 끝없이. 빗줄기들은 하늘과 땅을 가로질러 하나의 회색막을 만들고, 거리 위 사람들은 우산 아래 작은 우주를 이루며 그 물결 속을 종횡한다. 그들의 발걸음은 수평선 위를 달리는 물방울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창문은 습기로 흐릿하다. 손가락으로 닦아 낸 작은 틈새로 비의 수평 세계가 드러난다. 거리의 차량들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지나가고, 그 뒤로 번진 물안개는 건물들의 윤곽을 흐릿하게 삼켜 버린다.


모든 움직임이 수평의 법칙 아래 놓여 있다. 마치 그 어떤 것도 이 무거운 평행선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음을 선언하듯.

빗발 창에
雨脚横窗织,
心丝坠砚深.
檐声空界响,
墨痕古井沉.
(우각횡창직, / 심사추연심. /

염성공계향, / 묵흔고정침.)*


빗발은 창 가로질러 짜이고,*
마음 실은 벼루 깊이 떨어지네.*
처마 소리 텅 빈 세계에 울리건만,*
먹 자국은 옛 우물 속으로 가라앉네.*

월하시정

방 안은 고요하다. 수평으로 내리는 빗소리가 오히려 깊은 적막을 증폭시킨다. 책상 위에는 차가운 차 한 잔이 놓여 있고, 증기는 수직으로 하늘을 향해 아득히 사라진다.


그 기운을 따라 내 안의 무엇인가가 깨어난다. 창밖의 수평적 풍경은 오히려 내 사유를 수직으로, 깊은 곳으로 이끌어간다. 마치 우물 속 돌을 던지면 물이 수직으로 아래를 향해 파고들듯이.

그 깊숙한 곳에서 문득 열리는 서랍이 있다. 잊힌 기억, 미완의 생각, 깊이 묻어 둔 질문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서 있다. 그 서랍 속의 무게들은 수평의 현실과는 전혀 다른 질서를 가진다. 그들은 나를 아래로, 아래로 끌어당긴다.


그 속에서 과거의 한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비슷한 장마철, 어머니가 문턱에 앉아 빗물이 고인 마당을 바라보던 모습이었다. 그녀의 침묵 속에는 어떤 깊은 생각이 수직으로 가라앉아 있었을까?

그 침묵의 깊이를 나는 아직도 헤아리지 못한다.

심연의 자세

빗방울이 지면을 두드리는 횡선 위로
나는 내 안의 우물을 파고 있다


한 줌의 어둠을 건져 올릴 때마다
아래에서는 새로운 어둠이

차갑게 나를 부른다


떨어지는 것은 빗물이 아니라
나의 그림자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이 속으로 .

월하시정

사유의 수직 통로는 점점 좁아지고 깊어진다.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존재의 근원일까, 허무의 암반일까?

그 깊이를 내려갈수록 주변의 수평적 현실은 희미해지고, 오직 사유의 칼끝이 암흑 속에서 반짝인다.


마치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속 고독한 선비처럼,

차가운 겨울 속에서 오히려 정신의 불꽃을 지피는 자세가 여기 있다.


비의 수평성은 나를 나의 사유 깊이와 마주하게 하는 거울이다. 그 거울 속에서 나는 나의 유한함을 본다. 나의 사유가 닿을 수 있는 깊이의 한계를, 그 깊이조차도 결국 수평선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의 앞에 무릎 꿇음을 본다.

“너는 너의 깊이 속에 있는 그 깊이를 가져야 한다. 너는 깊이가 되어야 한다.” 릴케의 말이 귓전에 맴돈다. 나는 깊이가 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이미 깊이 속에 있지 않은가?


이 수직의 사유는 나를 나의 존재의 중심으로 끊임없이 되돌려 보낸다. 창밖의 비는 여전히 수평으로 내리고, 그 속을 스치는 무수한 생들은 각자의 수평적 궤적을 그린다. 그러나 이 방 안, 이 책상 앞, 이 차 위로 아득히 오르는 증기 아래서, 나는 나만의 수직을 향해 침잠한다. 그것이 비를 마주하는 나의 자세이다.

비는 결국 그친다. 흙냄새가 창문 틈으로 스며든다. 수평의 세계는 다시 생기를 되찾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내 안에 파여진 수직의 통로는 여전히 열려 있다. 그 깊이에서 나는 비가 남긴 소리를 듣는다.


수평으로 내리는 빗줄기와 수직으로 가라앉는 사유가 만나는 지점. 그 교차로에서 나는 비로 적신 세계의 무게를, 그리고 내 생각이 파고든 깊이의 침묵을 동시에 느낀다. 그것은 답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질문으로 나를 열어젖히는 힘이다.

우후(雨後)
雨收橫界淨,
思鑿竪痕幽.
天地方圓外,
心泉自湧流.
(우수횡계정, / 사착수유유. /

천지방원외, / 심천자용류.)


비 그치니 가로지른 세상 맑아지고,*
생각 팠던 세로 흔적 깊이 고요하네.*
하늘과 땅, 모난 것 둥근 것 그 너머에,*
마음의 샘 제 스스로 솟아 흐르네.*
월하시정


그 깊이 속에서 나는 창밖의 수평선을 바라본다. 이제 그 수평선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내 수직의 사유가 도달한 하나의 지평이다.


비는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지만, 그 속을 비집고 솟는 생각의 깊이는 하늘과 땅을 하나로 엮는 실타래가 된다. 이 실타래 끝에는, 비가 씻어낸 하늘처럼 맑은 깨달음이 아닌, 더 깊은 어둠과 더 무거운 빛이 공존하는 진실이 매달려 있다.


나는 그것을 풀지 않고, 그 무게를 온전히 짊어진다. 수평의 빗줄기와 수직의 사색이 만나는 이 자리에서, 나는 비로 적신 세상의 전율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이 깊이의 공명이야말로 비가 내리는 날,

창가에 앉은 자에게 허락된 가장 소중한 기도임을 깨닫는다.

수직의 깊이에서 수평의 빗소리를 듣는 자만이 비의 진정한 노래를 안다.


#산문 #에세이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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