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우산의 냄새는 방수처리된 향수처럼, 어둠 속에서도 마음을
비는 세상을 반투명의 유리관 속에 가두어 버렸다. 밖으로 퍼져나가는 모든 소리들은 그 습기 찬 장막에 막혀 희미해져, 창가에 기대어 있노라면 오직 내 안의 숨소리만이 고요 속에 맴돈다.
빗방울들은 창유리를 타고 흘러내리며 무수한 길을 새기고, 그 물길들이 서로 엉키고 갈라지며, 이내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내 마음속에 피어나고 지는 생각의 파편들이라도 거울에 비춰진 듯하다.
산중 우중
산중 빗속에 열매 저절로 떨어지고*
등잔불 아래 풀벌레 소리 들리네*
흰 머리 늙은이는 아직 관직 지키나니*
세상 일 한가한 이 고목에 맡기네*
월하시정
어릴 적 고향의 낡은 기와집에서 비를 맞던 기억이 스치듯 떠오른다.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마치 하늘의 수많은 발자국 소리였고, 마당의 석조(石槽)에 고인 물은 빗방울을 맞아 수없이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문지방에 걸터앉아, 비에 젖어 더욱 짙은 색을 띠는 마당의 돌들을 바라보곤 하였다. 그 돌들은 오랜 세월 비바람에 닳아 매끄러웠고, 그 위에 고인 빗물들은 마치 수정 조각처럼 맑았다.
할머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옛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그 목소리는 빗소리에 스며들어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노래처럼 부드러웠다. 그녀의 손은 마르고 거칠었지만, 내 머리를 쓰다듬을 때면 따뜻함이 스며들었다. 그 따뜻함은 오늘날 이 도시의 빌딩 숲에서 만나는
어떤 친밀한 표현보다도 진실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들은 대개 잊혀졌지만,
그 속에 담긴 온기와 빗소리와 어우러진 평안함만은 오롯이 남아, 어른이 된 나를 찾아오는 비오는 날마다 되살아난다.
그때의 낡은 검정 우산을 펼치면, 붉게 녹슨 살대에서 묵은 나무 냄새와 함께, 한 폭의 어둠 속에서도 마음을 적셔주던 따스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곤 했다. 그 우산의 냄새는 방수처리된 향수처럼, 어둠 속에서도 마음을 적시는 보이지 않는 따뜻함이었다.
도시는 빗속에서도 쉬지 않는다. 거리에는 우산들이 무수한 움직이는 섬처럼 떠다니고, 자동차들은 빗물을 튀기며 서둘러 지나간다.
사람들은 각자의 우산 아래 얼굴을 가린 채, 서로의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고, 서로의 숨결을 느끼지도 못한 채, 목적지를 향해 줄지어 걸어간다. 그 속에서 나 또한 하나의 섬이다.
커피숍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들이 모였다가 흘러내리고, 다시 새로운 물방울이 맺힌다.
그 변화무쌍한 모습 속에, 내 마음속에 스쳐가는 생각들—지나간 일들, 이루지 못한 일들,
아직 오지 않은 일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 생각들은 정리되지 않은 채,
빗방울이 모였다 흩어지듯,
일정한 궤적 없이 맴돌 뿐이다.
이 도시의 속도는 어느새 내 몸에 배어, 비가 쉬라는 신호를 보내도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불안하게 떨고 있다. ‘한가로움’은 사치품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러나 비는 이 도시의 경직된 얼굴 위에 부드러운 선을 새긴다.
고층 건물의 유리 외벽을 흐르는 빗줄기들은 그 차가운 표면을 일시적으로 녹여, 마치 눈물 흔적 같은 생기를 불어넣는다.
거리의 포장도로 위로 스민 물들은,
도시가 숨을 쉬는 듯한 맥박을 보여준다.
비는 단지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는 물방울이 아니라, 바쁜 일상에 쫓기는 우리에게 잠시 멈춰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은밀한 신호이기도 하다.
빗방울의 서정
유리 벽에 새긴 비의 흔적
무수한 눈물길이 흘러내린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들
그 소리들은 모두 내 안의 고백들
차가운 콘크리트 숲 속에서
빗방울만이 내 혼잣말의 유일한 청중
월하시정
그러나 이 고독한 대화 속에도 깊은 위로가 스며든다. 빗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지며, 내 혼잣말을 흡수해 어딘가로 데려가 버린다. 그것들은 땅속으로 스며들거나, 하수구로 흘러가거나, 결국은 다시 하늘로 돌아가
새로운 구름이 될 것이다.
내 마음속에서 맴돌던 무거운 생각들도, 빗소리에 실려 조금씩 가볍게 변해가는 느낌이다. 비는 세상을 씻어내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 마음속 쌓인 먼지들을 조용히 녹여내는 거름이 되기도 한다.
이 도시의 어느 익명의 창가에서, 나는 빗방울이라는 가장 순수한 청자와 나누는 대화를 통해, 외로움을 넘어서는 깊은 친밀감을 맛본다. 그 친밀감은 말이 필요 없으며,
단지 존재의 공명일 뿐이다.
빗소리는 세상이 나에게 건네는 가장 오래된 자장가이자, 내 혼잣말을 담아가는 가장 부드러운 그릇이다.
비가 그치고 난 뒤의 공기는 씻은 듯이 맑다. 하늘 한켠에 걸린 무지개는 자연이 내민 화해의 손길처럼 보인다. 거리의 우산들은 접히고, 사람들은 다시금 서둘러 길을 나선다.
나 역시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 창가에 머물며 나누었던 그 침묵의 대화는, 마치 빗방울이 유리에 남긴 흔적처럼 마음 한편에 스미어 있다.
우리는 모두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를 확인하지만, 비가 내리는 날, 창가에 홀로 앉아 마주하는 진정한 자신과의 마주침—그 순간의 고요한 대화야말로 가장 깊은 성찰의 공간이다.
빗소리는 결코 우리의 혼잣말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존재할 뿐이며, 그러한 존재만으로도 모든 내밀한 고백을 포용하는 무한한 친절이다.
빗방울은 하늘에서 내려와 땅을 만난다. 나의 혼잣말은 내면에서 솟아나 빗방울 속에 닿는다. 그 만남 속에서 나는, 고독이 결코 공허함이 아니라 영혼이 숨을 쉬는 가장 깊은 숲길임을 깨닫는다.
비 오는 날 창가의 고독은
결국 고요한 자아와의 재회이며,
빗소리는 그 재회를 위한 가장 신실한 증인이자, 가장 부드러운 청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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