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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잔 속에 스며든 장대비

과거의 먼지를 씻어내는 청량제이자, 때로는 잊고 싶었던 것들을 끌어올리는

by 월하시정

창가에 기대어 앉았다.

유리 너머로 세상이 물에 잠긴 듯하다.


장대비.

하늘과 땅을 잇는 무수한 실타래가 창문을 타고 흐르고, 그 아래로 도시는 물안개 속 풍경화처럼 흐릿하게 녹아든다. 손 안의 머그잔은 따뜻한 무게로 존재를 알린다.


검은 액체 위로 아슴아슴 피어오르는 수증기, 그 사이로 스며드는 커피의 깊고 쓴맛 나는 향기.

이 두 감각, 비의 차가운 습기와 커피의 따뜻한 아로마가 공기 중에서 교차하며 일종의 기묘한 화음을 이룬다.

빗줄기는 유리를 두드리는 리듬을 만들고, 그 소리는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닿아 무언가를 흔든다.


비는 소리다.

때론 격정적인 북소리처럼, 때론 속삭임처럼, 때론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기억의 발자국 소리처럼 다가온다. 이 소리는 커피잔 속으로 스며들어 액체의 표면을 살짝 떨게 한다.


아니, 어쩌면 내 안의 무언가가 떨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는 과거의 먼지를 씻어내는 청량제이자, 때로는 잊고 싶었던 것들을 끌어올리는 촉매제이기도 하다.

커피는 그 흐르는 기억의 강에 다리를 놓아 현재로 건너오게 하는 각성제다.


빗속의 서정

빗방울이 창을 타고 흐르면

지워진 글씨들이 스민다


유리창은 투명한 파란색

마음은 흐릿한 회색빛


커피잔에 비친 하늘은

잿빛 물결 위에 잠긴 배


한 모금의 쓴 향기가

젖은 기억을 건져 올리네

월하시정


커피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간다.

뜨거운 액체가 혀를 스치며 깊고 묵직한 풍미를 퍼뜨린다. 그 순간, 창밖의 빗소리가 잠시 선명해진다. 두 감각이 교차하는 지점, 그 접점에서 피어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이름 붙이기 어려운 정서의 덩어리다. 슬픔도, 기쁨도, 그저 아련한 그리움도 아닌, 일상의 틈새를 가로지르는 은은한 감동이다.


마치 오래된 사진첩을 뒤적이다 우연히 발견한 낙엽 한 장처럼, 아무런 각인도 없지만 그 자체로 완결된 시간의 조각처럼.


‘스며든다’는 동사가 갑자기 생생해진다.

빗물이 마른 땅 속으로 스며들 듯,

빗소리가 의식의 틈새로 스며들 듯,

커피의 쓴맛과 향기가 미각과 후각의 가장 깊은 곳으로 스며든다.


이 스며듦은 침략이 아니라 은유다.

하나가 다른 하나의 경계를 허물고,

서로를 풍부하게 만드는 방식의 은유.


장대비가 도시의 각진 윤곽을 무르게 하듯,

커피 한 잔의 따뜻함이 내면의 굳은 껍질을 조금씩 풀어낸다. 이 교차점에서 ‘일상’이라는 이름의 평범한 천에 ‘낭만’이라는 은색 실이 수놓아진다.


잔을 내려다본다.

표면에 갓 떨어진 빗방울 하나가 잔잔한 동심원을 그리며 사라진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다. 검은 커피 속으로 완전히 스며든 것이다.


그 작은 빗방울은 이제 커피의 일부가 되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내 혈관 속에서 장대비의 리듬을 이어갈 것이다. 이 스며듦은 융해다.


외부와 내부, 자연과 인공, 객관과 주관이 이 작은 도자기 그릇 안에서, 이 순간의 의식 속에서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녹아드는 현상이다.


커피잔 속 비(雨)영상

검은 거울 위에

하늘의 눈물이 맺힌다

한 방울, 두 방울

동심원이 번지고

스며드는 순간

커피는 바다가 되고

비는 강물이 되어

내 맥박 속으로 흐른다


쓴맛과 푸른 향기에

젖은 마음의 지도

창문에 그린 빗물 자국

그 너머로 펼쳐진

회색빛 세상 속

따뜻한 손길 하나


비는 여전히 쉼 없이 내리고 있다.

그 소리는 이제 단순한 환경음이 아니다.

내 안에서 커피의 쓴맛과 공명하는 생생한 리듬이다. 이 낭만은 화려한 서사나 극적인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창가에 앉아,

손에 쥔 한 잔의 온기와 귀에 들리는 빗소리에 온전히 존재하는 이 순간 그 자체에서 우러나온다.

그것은 감각의 각성을 통한 일상의 신성화다. 비가 씻어내는 것은 도시의 먼지뿐만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평범함의 껍질이다.

그 아래로 드러나는 것은 사물과 순간에 대한 순수한 경이로움이다.


커피잔은 이제 거의 비어 있다.

바닥에 남은 검은 자국이 마지막 한 방울의 흔적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 향기는 여전히 입안과 코 주위에 맴돌고, 창밖의 빗소리는 변함없이 지속된다.


스며든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형태를 바꾸어 존재를 이어간다. 빗방울이 커피 속으로, 커피의 쓴맛이 내 의식 속으로, 의식의 파동이 이 비 오는 오후의 정서 속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이 침윤(浸潤)의 과정 자체가 가장 은은하면서도 강력한 낭만이다.


장대비는 결국 그친다. 언젠가는.

구름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빗방울이 유리창을 타는 속도가 느려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커피잔 속으로, 내 영혼의 빈 공간으로 스며든 비의 정서는 남을 것이다.


그것은 일상의 틈바구니에서 피어난 서정의 꽃이다. 화려하지 않아서 더 진하고,

짧아서 더 오래 간직되는.


유리창에 맺힌 작은 물방울 하나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길게 흘러내린다.

마치 한 줄기의 시(詩)처럼.


나는 텅 빈 머그잔을 손에 쥔 채,

비가 씻어낸 세상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창밖을 바라본다.


손끝에는 아직도 머그잔이 전해준

따뜻함이 스며들어 있다.

#단상 #에세이 #수필 #비 #서정 #커피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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