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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가락지와 종이배의 항해일지

네가 건넨 연지홍(臙脂紅) 붓으로 내 청포에 두 줄 시를 쓰더라

by 월하시정

옥가락지


제1장: 만남의 봄빛
붉은 실이 꼬여 동심결이 되던 날
연못가 버들잎이 푸른 비단 되고


너의 옥가락지에 맺힌 이슬
내 소매에 번졌다가 사라졌네


웃음소리 따라 물 위를 걷노라니
한 뿌리에서 핀 연꽃 두 송이


잎사귀 뒤엎으며 햇살을 나누고
홍조 띤 네 뺨에 꽃잎이 스쳤네

제2장: 맹세의 정기(正氣)
황금실 수놓은 제비 한 쌍
대들보 사이에 둥지를 튼 뒤


우리도 백년의 약속을
붉은 침향상에 새겼더니


향연이 옥같은 누대에 오르고
술잔에 담긴 달빛 흔들리네


네가 건넨 연지홍(臙脂紅) 붓으로
내 청포에 두 줄 시를 쓰더라


"뿌리 깊은 나무 바람 모른다"
"이 몸이 먼저 가거들랑..."

제3장: 화수의 꽃길
삼 년을 꽃 핀 정원에선
석류 열매 터져 주홍 구슬 흩어지고


너의 비단 치마폭에
국화무늬가 피어올랐네


밤마다 거문고 타니

학이 달 아래서 춤을 추고


새벽에 화장대 지키니

거울 속 꽃들이 말을 걸더라


쌍쌍이 뜬 기러기 그림자
화문(花紋) 베갯속에 새겨 두었으니.

제4장: 영원의 노을
봄바람 다시 옥난간 스칠 때
화류(花柳)가 옛 길을 인도하더니


연못가 그 자리에서
백년로(百年露) 맺힌 연봉오리


한 줄기 줄기에 두 꽃송이
서로 마주 보며 피어 있네


못 밑 황금잉어 두 마리
입맞춤하며 지는 해 바라보니


붉은 실이 천년의 매듭 되어
구름 사이로 선계(仙界) 이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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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배의 항해일지


제1장: 출항
우리가 종이배를 접던 날
네 손금이 내 손금 위로 흘러
접힌 선들은 강이 되었다


종이 위에 닻을 그리던 네 손가락
지금도 내 눈가에 젖어 있다


"이 배는 영원항으로 간다"
네가 쓴 항해 목적지 아래


물감으로 그린 해파리 떼
파란 불빛을 깜빡이던 날

제2장: 폭풍전야
첫 달밤의 항해일지엔
"종이배가 석양을 삼키다"


둘째 장에선

"우리 몸짓이 갑판에 그림자로 박혔다"


다섯 번째 달
네가 적었지
"바다의 소금기가 접착제를 녹인다"


일곱 번째 장

모서리 잉크 번진 곳에
네 눈물 자국이 산호초가 되었다


제3장: 표류
열두 달밤의 기록
마지막 페이지엔 경고가 서린다


"닿지 못할 항구를 꿈의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


그 뒤로 종이배는 지도 없는 바다에서
네가 그린 닻이 부서진 부표가 되어
파도에 치이던 밤 나는 일지에 새겼다


"종잇장 배는 한 줄기 바람에도
흔들림을 숨길 수 없다"

제4장: 침몰
이제 기억들이
잉크처럼 번지기 시작한다


종이배 갑판에 서 있던 우리
잠수함처럼 가라앉는다


물거품이 되어 떠오르는
항해일지 조각들 사이로


네 목소리만 살아남아
파도 소리와 싸우네


"종이배는 결국 바다의 습기를 사랑한
배의 자살이다"


마지막 문장이 소금물에 녹아
해저 사막에 쓰여진다
__"사랑은 영원한 항해불능 상태"__

제5장: 잔해
가라앉은 종이 위로
물고기 떼가 글자를 쪼아 먹는다


닻 그림자는 이끼가 되어
바위에 달라붙었고


파도가 밀어닥칠 때마다
접힌 선들이 스스로 풀리네


지금 내 눈물바다엔
네가 그린 닻 자국만
외로운 부표로 제자리를 맴돌 뿐 .

#한시 #현대시 #사랑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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