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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과 이슬의 변주곡

장마의 마지막 눈물이 여름의 첫 땀방울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by 월하시정

여름이 내리는 선물

장마는 어느새 발톱을 접고 도망쳤다.

비는 무거운 커튼을 쓸어내린 채 훌쩍 떠났고, 하늘은 눈부시게 파란 도화지를 내려놓았다. 땅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축축한 숨결이 아스팔트를 스치며 김이 되어 솟구쳤다.


장마의 습기가 아직 벽에 곰팡이를 피워내는 사이, 여름은 이미 문지방을 넘어 실내로 뛰어들었다.

첫날 아침이었다.

창문을 열자마자 쏟아져 들어온 것은 공기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솜덩어리였다.


숨을 쉴수록 목구멍에 달라붙는 그 무언가—마치 공기를 마시는 게 아니라 공기에게 삼켜지는 기분이었다.


바깥 나뭇잎들은 초록빛을 온몸으로 발산하며

햇살을 삼키고 있었다.

잎맥 속을 흐르는 수액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다.

‘이제 내 차례야,’ 햇살이 속삭였다.

*

더위는 단순한 기온이 아니다.

생명체다.
무겁고 끈적한 실타래처럼 몸에 휘감기고, 귓가에 달콤한 유혹의 속삭임을 내뱉는다. ‘움직여 봐, 땀 한 방울이라도 흘려 봐,’ 하고.

나는 더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책상 앞에 앉았지만, 종이는 습기로 부풀어 올랐고

볼펜은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책상 위 커피잔에 맺힌 물방울들이 서로를

찾아 합쳐지며 줄기를 만들었다.

마치 작은 강이 탄생하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발랄함은 무더위 속에서도 피어난다.
아이들이 물총을 들고 마당을 뛰어다니는 소리가 창문을 두드린다.


물보라가 햇빛에 부딪히는 순간 일곱 빛깔로 부서지며, 공기 중에 순간적인 무지개를 수놓는다.


그들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웃는다. 그 웃음소리는 마치 시원한 수박 한 입에 깨지는 사각사각한 소리와 닮았다.

수박은 여름의 보석이다.

톡 쪼개는 순간, 선홍빛 과육 속에 갇혀 있던 서늘함이 ‘탁!’ 하고 세상으로 뛰쳐나온다.

*

밤이 오면 더위는 변주곡을 바꾼다.
낮의 강렬한 푸가(fuga)에서 밤의 잔잔한 사라반드(sarabande)로. 뜨거운 아스팔트는 서서히 내뿜던 열기를 거두고, 대신 공기 중에 미세한 이슬 알갱이들을 뿌린다.


가로등 불빛 아래 모여드는 나방들은 광란의 왈츠를 추고, 반딧불은 풀숲에서 반짝이는 포포로(popororo)를 연주한다.


창가에 걸린 바람종이 울리는 소리는 뜨거운 공기에 녹아 흩어지다가, 한밤중이 되면 맑은 종소리로 변한다.

나는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하늘로 올라간 기분이었다. 별들이 땀처럼 반짝이는 밤하늘 아래, 더위는 이제 포근한 담요가 되어 몸을 감싼다.


낮의 고통스러운 열기는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땅속 깊은 곳에서 다음 장마를 준비하며 웅크리고 있으리라. 장마는 씨앗을 불리고, 더위는 그 씨앗이 땅 위로 고개 내밀게 한다.

여름은 결코 잔인하지 않다.
그는 우리에게 땀과 이슬이라는 두 개의 날개를 달아준다. 땀으로 흙의 기억을 되새기고,

이슬로 밤의 시를 쓰게 하려는 것.


발가벗은 아이들이 물웅덩이를 뛰어넘듯, 우리도 이 무더위의 물보라를 뛰어넘어야 한다. 어차피 이 뜨거운 축제는 계절의 손바닥 위에서만 깃들잖아?

첫새벽,

창문에 맺힌 이슬 방울 하나가 햇살에 녹아 내렸다. 장마의 마지막 눈물이 여름의 첫 땀방울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 작은 구슬이 흙속으로 스며들며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모든 촉촉함은 결국 빛으로 돌아가리라.”
장마가 남긴 습기와 더위가 빚은 뜨거움이,

이 땅 위에 살아 숨 쉬는 우리를 위한 지상 최대의 향연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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