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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와 Apr 15. 2023

그날의 얼굴들

광주를 기억하며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아아 짧았던 내 젊음도. 


                                                      민중가요 『그날이 오면』 中     



봄에서 여름 사이.

나는 광주를 떠올리면 그 얼굴들이 생각난다.   

   

TV 뉴스에 나오는 미얀마 사람들의 죽음과 절규를 보며, 나도 모르게 몸이 떨리고 탄성과 함께 주르르 눈물이 흐른다. 1991년 여전히 잔인했던 4월. 사회는 연일 계속되는 시위로 어수선하고 정부는 시위를 금지함과 함께 시위대에 강경대처 하기로 했다는 방안이 발표되었다. 그래서, 명지대 학생 강경대를 쳐서 죽였다. 흰색 헬멧과 얼룩 청자켓을 입은 백골단에 의해서였다. 장례식 노제를 지내던 중, 장례 행렬은 광주로 향했다. 자가용 안엔 연로하신 문익환 목사님이 타고 계셨고 대형 영정 사진을 세워 묶은 작은 트럭, 그리고 농민복을 입은 풍물패. 나는 그 일행 중 하나였다. 


  대학졸업후 당시 민족 예술인 총연합 소속 춤꾼이었던 나는 풍물패 인원이 모자란다는 말에 흔쾌히 합류했고, 노제 행렬을 막아선 전경과의 오랜 대치 상황 끝에 원래의 목적지와는 다르게 광주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처음 와보는 광주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어디가 어디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행을 따라 걷는 중이었다. 


  “이봐, 학생! 잠깐 서보드랑께?”

  “네? 저요?”


나를 다급히 불러 세운 사람은 허리가 반쯤 굽으신 한 할머니셨다. 할머니는 전라도 사투리와 함께 치마를 걷어 올리시고 고무줄을 늘려 몸빼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셨다. 흰 명주실로 삐뚤빼뚤 기워 만든 속주머니 깊은 곳에서 한번 두 번 세 번 접은 천 원 짜리 세 장을 내 손에 굳이굳이 쥐어 주시며 말씀하셨다. 


  “객지에 나오면 돈이 있어야 혀.” 


  내가 “아니에요. 주머니도 없어요.”라고 하며 손사레를 치자 신발을 벗어 운동화 바닥에 깔라고 하셨다. 이 빚을 어떻게 갚으라고. 할머니는 걱정과 주름 가득한 얼굴로 몸 조심 하라며 나를 돌려 세우셨다. 조금 걷다가 갑자기 “뛰어!” 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투구에 가려 얼굴도 안 보이는 전경들이 새까맣게 뛰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정말 죽기 살기로 논밭을 가로 질로 비호(飛虎)처럼 뛰었다. 슬로우 비디오처럼 느리게 느리게 달리는 꿈을 아직도 꾼다. 


  그런 우리 앞에 트럭 하나가 서더니, “나도 먹고는 살아야 허니께!”라고 하면서 청테이프를 번호판에 붙인 후 우리보고 트럭에 타라 하셨다. 덜컹거리는 트럭에 실려 우리는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달렸다.


  어느 순간 나는 콩나물 시루에 콩나물이 삐져나오듯 건물 창문마다 얼굴을 내민 사람들과대로변 사거리 넓은 아스팔트를 빈틈없이 꽉 메우고 앉은 군중들의 떠나갈 듯한 함성 한복판에 서 있었다     


  내가 모시던 스승님께서는 언제나 춤은 즉흥이라고 하셨다. 약삭빠르지도, 듣기 좋은 아부도 못 하셨던 독불장군 스승님은 초야에서 알콜 중독으로 돌아가셨지만 진정한 광대셨다. 스승님 말씀처럼, 모든 춤과 인생이 짜여진 계획대로만 된다면 얼마나 쉽겠는가. 연습과 생각과 공부는 평소에 하는 것이고, 무대에서는 그 모든 것을 녹여내어 관객과 함께 즉흥으로 만들어 내어야 진정한 춤이라고 하셨다. 춤이 인생이고 소리가 춤이고 악기가 삶이고 그림이 춤이다. 그렇게 춤을 추었다.      


  사흘 만에 집에 왔다.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피곤에 쩔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중간에 연락할 수 있는 딱 한 대 있던 공중전화는 너무나 줄이 길어 엄두를 못냈다. 서울에 와서는 또 일정이 너무 바빴다. 집 앞에 와서 그제서야 아차. 부모님께 연락을 못한 것이 걱정이 되었다. 엄마는 나를 보더니 입만 벌린 채 아무말도 못하셨다. 씻지도 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 무렵. 술에 취한 아버지가 방문을 벌컥 여시고 들어오셨다. 백 킬로그램이 넘는 큰 체구의 아버지께서는 내 침대 발 끝에 엎드려 오래도록 꺼이꺼이 흐느껴 우셨다. 아버지가 우시는 것을 처음 봤다. 엄마가 달래서 방을 나가실 때까지. 살면서 가장 큰 불효를 저질렀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20대를 온통 치열한 고민 속에 살았다. 매일 매일이 걱정과 한숨과 울분의 연속이었다. 지금도 고민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 인생에서의 모든 고민을 20대에 한 것 같다. 기억이 깜빡깜빡 하는 요즘. 돌이켜 보면 구체적으로 뭘 그리 고민했나 생각도 잘 안나지만 주위에 많은 선배들이 나름의 기득권을 버리고 현장으로 현장으로 헌신하던 때였다. 아님 외국으로 가난한 유학을 가거나 원치 않는 군대에 끌려갔다. 당시에 무용과 출신 활동가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내 고민은 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았기에 계속 현장에서 춤을 추었다. 결혼하기 전까지. 


  어느덧 그때와 환경이 많이 달라졌지만, 또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것도 많지만, 지금도 나의 20대가 내 인생에 큰 밑거름이 된 것만은 사실이다. 내가 살아가는 원동력이며 삶의 근거가 된 것이다.  

    

  춤을 추지 않은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내가 살아온 것을 후회하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리라. 20대 때 고민하지 않았다면 지금 더 큰 고민 속에 있으리라. 아마도 지금의 나는 돈을 쥐어 주시던 할머니의 얼굴과 나를 쫓던 전경의 투구 얼굴. 나를 날라주던 트럭 아저씨의 얼굴 그리고 빌딩 창문가의 광주 시민의 콩나물 얼굴. 울음 가득한 아버지의 얼굴. 이 모든 얼굴이 바탕이 되어 인생 한판 큰 춤을 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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