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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병우 Jul 21. 2024

상전벽해

세월의 속도는 나이에 비례한다는 말이 있는데 요즘 들어서 부쩍 그 말에 공감이 간다. 손가락을 꼽아보니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가 어언 반백년의 세월이 흘렀다. 마음속에는 아직 동심이 남아 있는데 그 숱한 세월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야속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가회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집에 대기와 도성초등학교의 역사 및 동문들의 글도 함께 모아 편찬하기로 결정한 기념사업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아울러 교육 백년지대계를 완성하면서 그동안 수많은 훌륭한 인재를 배출하여 사회의 주역으로 길러낸 가회초등학교와 동창회에 축하를 드리는 바이다.     


   대기초등학교는 가회면 소재 3개 초등학교 중에서 가장 늦게 개교하여 가장 일찍 폐교되었다. 대기초의 1회 졸업생은 가회초 39회, 도성초 19회에 해당한다. 따라서 대기 학군에서 1회 이전의 형님 누나들은 가회나 도성초등학교를 다녔다.

   황매산 골짜기의 학령인구 증가로 1961년에 가회국민학교 대기분실 1개 학급이 한밭에 만들어졌고, 이듬해에 가회국민학교 대기분교로 출발했다가 1966년에 비로소 6개 학년이 완성되면서 대기국민학교로 독립했다. 그 후 1991년에 제25회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폐교할 때도 잔여 학생들은 가회국민학교에 수용되었다. 국가 정책의 일환이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가회초등학교는 대기초등학교의 생멸 과정에서 보호자 역할을 한 셈이다.     


   대기초등학교 총동창회는 모교가 폐교된 지 13년 후인 2004년에 결성되었다. 부산 연산동에 본부를 두고 있었던 법연원이 황매산 박덤 아래에 법연사라는 이름으로 새로 터전을 잡고 대기초등학교 건물을 법연사 연수원으로 매입 추진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우리의 어릴 적 추억을 오롯이 담고 있는 모교를 현재 상태로 보존하고 지키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 일환으로 2004년 9월 추석 연휴에 대기초등학교 건물에서 열린 임시 총회에서 윤명중 초대회장이 선출되면서 비로소 대기초등학교 총동창회가 출범하게 되었고, 이듬해인 2005년부터 매년 황매산 철쭉제 기간인 5월 둘째 주 토요일에 모교 운동장에서 한마음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해마다 봄소식이 전해질 때면 경향각지 우리 동문들의 마음 한켠에는 그리움과 설렘이 자리 잡기 시작한다. 학창 시절에 소풍날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고향을 찾고 친구와 선후배를 만나는 한마음축제기다리는 마음 때문이다. 이 날이면 전국 각지에서 전체 졸업생 990여 명 중에서 매년 300명 이상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룬다. 낮 동안 모교 교정에서 전 동문이 함께 어울려 신나게 축제 행사를 치르고, 밤이면 각 기수별로 별도의 장소에서 동기회를 개최한다. 이날은 전체 동문들이 각자의 가정에서 합법적으로 외박이 허락된 날이다. 밤새 동기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다음 날에는 황매산 철쭉 군락지를 찾아서 산보를 하는데 이곳은 선후배들과의 또 다른 만남의 장이 되어 웃음꽃이 만발한다.     


   우리 대기 8회가 처음으로 '대팔동기회'를 결성한 때는 제1회 동창회총회가 있었던 2005년 5월이다. 졸업 후 31년 동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진 친구들을 모으기 위해서 초등학교 때 두 번이나 담임을 맡으셔서 친구들 마음에 영원한 스승으로 남아 있는 김현무 선생님을 모시고 사은회를 갖기로 했다. 선생님은 탁구부를 이끌어 합천군 대회에서 두 번의 우승과 한 번의 준우승을 이끄셨고 대기학군의 농촌계몽운동에 공이 크신 분이다. 이때 60여 명의 졸업생 중 40명이 참석했다.

   모교 교정에서 총동창회 행사를 마치고 사은회 행사장인 점촌가든으로 이동해서 선생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마당에 두 줄로 도열하여 31년 만에 처음 뵙는 선생님 내외분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꽂아드리고 열렬한 박수로 환영했다. 식장에서 식순에 따라 선생님께 미리 준비한 양복을 입혀드리고 스승의 은혜 노래를 합창했다. 그 당시 사십 대 후반의 나이에 우리는 초등학생 분위기로 돌아가 선생님의 훈시 말씀을 들었다. 이때를 기회로 우리 동기회의 분위기는 급속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2006년 8월에는 정년을 맞으신 김현무 선생님께 퇴임식을 해드렸다. 해변이 보이는 부산 광안리 민락회타운 10층 진주횟집을 전세 내어 풍선과 현수막 걸고 행사장을 예쁘게 꾸몄다. 이때 전국에서 43명의 친구가 참석했는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정년을 맞으시는 선생님께 드릴 편지를 써오기로 사전에 약속했었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친구들은 선생님이 도착하시기 전에 현장에서 정성껏 편지를 썼다. 퇴임식 행사를 거행하면서 3명이 대표로 감동적인 편지를 낭독한 후 전체 편지를 선생님께 전해드렸다.

   “오늘은 내가 교직에 몸담은 이후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날입니다. 대기초등학교 8회 여러분들이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줄 정말 몰랐습니다. 여러분에게서 받은 이 편지를 앨범에 한 장 한 장 붙여서 두고두고 읽고 가보로 간직하겠습니다.” 편지 뭉치를 받아 든 선생님께서 목이 메어 말씀을 잊지 못하셨다. 옆에 앉아 계시던 사모님께서도 눈시울을 적시고 계셨다. 이날 친구들의 마음은 스스로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들어 용광로의 쇳물처럼 하나가 되었다.     

   2012년 8회가 한마음축제 주관기였을 때는 우리 동기들의 학창 시절 추억을 모아 '한밭골 사람들'이라는 한 권의 단행본을 발간했다. 동화에나 나올 법한 우리들의 추억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 뜻을 이루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동기들의 글을 실었는데 자신의 글이 단행본으로 출판된 것에 모가슴 뿌듯해했다. 별도의 장에 동문 선후배들의 글도 기수 당 두 편씩 함께 실어서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이 책이야말로 둘도 없는 보물로 책꽂이에서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옛 추억도 점점 희미해져 가는데 가끔씩 이 책을 들추어보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맴돈다.      


   초등학교 시절을 회상해 보면 마음이 아련하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1968년도는 사회적으로 어수선한 때였다. 그해 1월 21일에 북한의 124군부대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고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1‧21 사태'가 있었고, 11월에는 동해안으로 침투한 120명의 무장공비가 군경과 예비군에게 쫓기다가 평창의 어느 산골마을에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했던 이승복의 입을 찢어 죽인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있었다. 그부터 가슴에는 반공방첩이라 쓴 붉은색 휘장을 달고, 학교에서 나눠준 간첩식별요령이라는 접이식 유인물을 들고 다니며 혹시나 간첩이 나타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곤 했다.

   당시 대기초등학교는 벽지학교로 분류되어 무상급식의 혜택을 받았다. 빈 도시락을 가지고 가면 점심시간에 강냉이죽을 나눠주고, 강냉이 빵도 주었다. 몇 년 후부터는 강냉이 대신 밀가루로 만든 빵을 주고 끓는 물에 분유를 타서 한 잔씩 주기도 했다. 언젠가는 학교에 빈 자루를 가지고 오라고 해서 미처 소비하지 못한 밀가루를 반 포대씩 나눠주었던 기억도 있다.     

   이른 봄날 시냇가 바위의 얼음이 조금씩 녹고 버들강아지에 물이 오를 때면 달짝지근한 버들강아지를 따먹고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온 산에 진달래가 만발하는 봄날이면 하굣길에 진달래를 한 아름 꺾어 가슴에 안고 꽃잎을 따먹고, 밀이나 콩의 열매가 탱글탱글해지면 밀사리나 콩사리를 해 먹으면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여름날이면 매일같이 친구들과 알몸으로 시냇물에 멱을 감고, 소를 먹이러 산에 가서 온갖 놀이를 즐겼다. 겨울이면 눈 덮인 산에 토끼몰이를 가고, 칡을 캐러 이산 저산을 헤매고 다녔다. 고학년 때 천황재를 거쳐 황매산 삼봉까지 가을소풍을 갔던 때가 있다. 삼봉에서 해산 후 귀갓길에 빠른 길을 택한다고 정글을 헤매면서 고생했던 기억도 있다. 그 당시 황매산은 목장이 들어서거나 지금처럼 개발되지도 않은 때여서 밀림이었고, 우리에게 온갖 먹거리를 제공하는 젖줄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면소재지인 가회는 특별한 곳으로 생각되었다. 대기 학군에는 내가 중학교 2학년이었던 1975년도까지 호롱불을 켰고 TV도 없었다. 벼나 보리 수매 등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트럭조차 볼 수 없었기에 시외버스가 다니고 전기불과 TV가 있는 가회는 대도시처럼 여겨졌다. 더욱이 면사무소, 우체국, 파출소, 장터까지 있으니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때 학교가 파한 후에 큰마음먹고 친구들과 가회에 자전거를 배우러 갔던 때가 생각난다. 현재 농협 앞에 가회 장터가 있었고 그 맞은편에 자전거방이 있었는데 50원을 주면 한 시간 동안 자전거를 빌릴 수 있었다. 비틀비틀 자전거를 배우다가 심하게 넘어져서 핸들이 홱 돌아가 버리면 다친 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전거를 물어줘야 한다는 생각에 안절부절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한골 이팝나무를 지나면 그 동네 애들이 나와서 낯선 우리에게 욕을 하고 돌멩이를 던지며 따라오면서 괴롭혔다. 무심결에 돌을 던지는 사람과 맞는 개구리의 관계처럼 이는 우리에게 늘 커다란 공포로 다가왔다.     


   초등학교 시절이 엊그제 같고 마음은 이팔청춘이건만 어느덧 내 친구들은 육십 대 중반을 넘고 있다. 어릴 적에는 끼니조차 때우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게 살았지만 자연에서 배운 호연지기로 지금은 모두들 사회 각처에서 나름의 자존심을 지키며 멋쟁이로 살고 있다. 하늘아래 첫 동네 깡촌으로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던 나의 고향도 이제는 많은 이들이 부러워하는 명소가 되었다. 이런 것을 두고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하던가.       


   2010년경 가회면 3개 초등학교를 하나로 묶어 ‘가회면초등학교 동창회’를 결성하여 많은 분들이 노력하고 있다.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회면 출신들 모두의 마음이 하나 되어 통합동창회가 더욱더 발전하고 부흥하기를 희망한다.

   다시 한번 가회초등학교 100주년을 축하드리며 동창회의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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