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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마르 왕자 Dec 28. 2022

우리에게 교육열이란?

왜 학교에서 묻고 답하는 것을 체화시키지  못하는가? 

우리는 팔만대장경,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의궤' 혹은 '난중일기'와 같은 엄청난 기록문화를 가진 민족이다. 이러한 기록문화의 성립은 물론 일찍이 통일국가를 이룬 중국의 기록문화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고조선, 고구려와 같이 북방에서 힘을 바탕으로 통치한 국가들에서는 자체로 남긴 문헌이나 사료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는 '문' 혹은 '법'을 기반으로 통치하는 국가의 전통이 중요한 요소가 됨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문치' 혹은 '법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치자가 이러한 지식에 대한 소양을 쌓아야 하고 이러한 시스템을 운영하도록 위임하는 관리들과 문답할 수 있을 만큼 '체계'에 대하여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왕' 스스로가 공부하지 않고서는 통치자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유능한 '통치자'가 되기 위해서는 관료들과 지식인들보다 더 우월한 지식을 쌓아야 했다. 


이 모든 것들의 시작은 사실은 '책 읽기'이고 책 읽기를 통해 어느 정도 기본지식이 쌓이면 스승과의 문답을 통해 지식을 확장하고 자신만의 독자적 견해를 확립하여 토론하기에 이르니 듣고(보고) 묻고 답하고 쓰는 이 과정은 모든 종류의 공부에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 필수적인 요소다. 그전까지 잘 유지되어오던 우리의 문화적 자산인 '학습'의 전통이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이 세 가지 행위에 대한 직접적 통제를 받았고 결국 전승되어오던 무형의 자산을 상실하고야 만다. 이는 우리 민족의 발전을 가로막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자 유물이나 보물을 약탈당한 것보다 더 뼈아픈 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 개화기에 신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우리는 이러한 문물들이 어떻게  기존의 사회질서와 어떻게 갈등관계를 일으키는지를 관찰하고 이러한 갈등관계를 해소할 수 있을지 답할 시간적 여유를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태도를 정리하는 글쓰기조차 계속 지체되어 왔다. 선택할 권리를 빼앗기는 것은 '주체'의 상실로 이어지는 커다란 고통이며 시련이다. 


이와 같이 학습의 정신적 유산이 상실된 체로 행위만 남은 것이 우리의 '교육열'이다. 거대한 사교육시장이 떠받치고 있는 우리나라 교육현장의 모습은 명문대 입시와 성공이라는 목표를 위해 달려가는  '전국 마라톤 대회'의 그것이다. 물론 마라톤 대회에서 최종적으로 메달을 목에 걸었다고 갑자기 인생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만 12년이란 기나긴 과정에 대한 보상으로서는 값어치가 있음에는 분명하다. 또한 대학입시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여러 가지 단련의 과정이 당면할 취업전쟁에 필요한 훈련의 기본과정이라고 자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내는 '학습'에서 멀어지는 일이 벌어지는 데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드물다. 지하철에서 핸드폰에 열중하는 직장인 아닌 학생들조차도 대부분  쇼핑을 하거나 게임을 하고, 너튜브를 시청하고, SNS를 할 뿐(물론 이러한 일들이 그 순간에는 나름 중요한 일이리라) '학습'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은 희귀 동물을 보는 것만큼 찾기가 어렵다.  이는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공부하는 척해야 하는 연극의 무대에서 벗어난 이들이 가지는 자연스러운 태도이지만 천년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긴 민족이라고 무언가 남다른 게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이에게는 무척 실망스러운 풍경이리라.  


오늘날 학문의 전당이라고 하는 대학이 이렇게 흔들리는 이유는 아마도 학습의 정신적 유산이 결여된 채로 건물만 쌓아 올린 상아탑의 허약한 체질이 문제일 뿐 아니라 '학습'을 수단으로 삼을 뿐 삶으로 체화시키지 못하는 "무늬만 선수"들이 가득한 교육현장의 세태를 반영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학교라는 시설이 영국에서 생겨난 이유가 공장에서 일해야 하는 부모들을  위해 아이들을 집단적으로 감시한 것이 시작이라는 것을 안다면 오늘날 학교교육의 목표가 일정정도의 의무를 이행하는 혹은 국가 시스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표준적 시민을 양성하는 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자식들을 길러내고자 하는 부모의 욕망이 학교에서 발현되지 못한 결과로 사교육이 잉태되었음도 알 필요가 있겠다.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왜 공부를 업으로 삼는 학자들이 되려 하는 이들은 왜 이렇게 턱없이 모자라는지,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도 '선수생명'을 일찍 끝내고 싶은 '마라토너'들이 넘쳐나는지 알 필요가 있겠다. 그것이 교육개혁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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