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적 근본과 국력에 대하여-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의 필즈상 수상은 과거 김연아 선수가 밴쿠버에서 피겨 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딴 것처럼 국민적 관심사가 되었고 언론에 크게 조명되어 국가의 위상을 드높인 사건으로 회자되었다. 소위 '국뽕'이란 정서라고 놀림받을지언정 수학계 내부에서도 우리나라 수학계의 저력과 그동안의 발전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크게 공치사를 하며 잔치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우리나라 과학계는 오랫동안 '노벨상'을 갈구해왔다. 입자물리학 분야에서 노벨상에 근접해 있던 시기-서울대 김진의 교수의 경우-도 있었다. 매년 노벨상 수상 시기인 10월이 되면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노벨상 후보 명단에 올라갔는지를 다루는 뉴스가 올라온다. 그러나 노벨상 수상이 불발에 그치고 난 뒤에는 대중의 관심은 썰물 때처럼 사라져 왜 수상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후속 이야기조차 아무도 들려주지 않는다. 차라리 영화제에 출품된 후보작은 경쟁 후보작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극장에라도 상영되어 관객에게 선보일 기회라도 주어지지만 '노벨상 후보'라는 마케팅의 유효기간이 고작 일주일이라니 이래서 다들 잿밥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가 도는지도 모르겠다.
흥행성 면에서는 필즈상과 노벨상이 같은 등급에 속할지 모르지만 필즈상은 노벨상과는 전혀 다른 동기에서 출발한다. 애초에 알프레드 노벨이 인류의 삶에 중대한 공헌을 한 과학적 업적을 기려 노벨상을 만들면서 수상업적은 학문적 성취뿐 아니라 그 학문적 성취가 필연적으로 현실 사회에 응용되어 중대한 성공을 가져온 사례 입증을 동반한다. 이에 반해 필즈상은 수상자의 박사학위와 그 후속적인 결과들에 주목하여 젊은 학자들의 성취를 축하하고자 찰스 필즈가 제정하였으며 자칫 '노땅'들의 전쟁터로 변할 수 있는 수상위원회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된 '만 40세 미만'이라는 결정적 단서가 붙는 상이다. 노벨상은 일종의 'Life Achievement'로 학자적 명예가 될 수 있으나 필즈상은 학자적 명예라기보다는 우리에게 익숙학 국제 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혹은 '신인 감독상'으로 보아 마땅할 것이다. 즉 거장이 될지도 모를 신진 수학자의 국제적 데뷔가 필즈상 수상에 대한 적절한 해석이지 않을까?
학자의 길을 가면서 대중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수많은 논문과 저서를 펴내고도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일생에 단 세편의 논문을 쓰고도 오늘날까지 과학자의 아이콘으로 등장하는 아인슈타인 박사도 있다. 그러므로 허준이 교수의 필즈상 수상과 대중이 알아보는 스타 과학자의 반열에 오른 일들은 인생의 여러 가지 우연과 행운이 겹친 결과로 보는 것이 보편타당한 해석이다. 현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수학과 교수인 신석우 박사가 40세 전후해서 보여준 학문적 성취와 필즈상 수상자인 허준이 박사의 학문적 성취를 비교하기는 너무 어려운 문제이며 왜 신석우 박사는 필즈상 수상에 실패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도 오직 신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물론 그 당시 신석우 박사의 경쟁자들이 더 뛰어난 성취를 보여주었을 수도 있고 IMU 위원회에서 아시아 쪽 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을 가능성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을 나열할 수 있겠으나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진실이다.
물론 고독한 학문의 여정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다 프로 수학자가 되지 못하고 실패하는 아마추어들이 훨씬 더 많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더 어려운 문제들과 씨름하여 프로 수학자가 된 허준이 박사의 성취에 나 또한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허준이 박사의 성취에 대하여 한국 수학계의 발전과 결부시키는 그 어떠한 시도도 나는 반대한다. 그의 수상은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우리나라의 국력이나 수학적 발전단계가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미국, 러시아, 중국, 인도, 캐나다, 이탈리아와 같은 단계에 이르거나 그들 국가보다 나아져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결과물이 아니다. 조그만 나라에서 높은 교육열을 통해 배출하는 인재들은 대부분 경쟁적인 입시제도의 산물들이며 우리나라의 대학에서 오늘날 배출되는 박사학위자들 또한 가장 취업이 잘되는 분야에 몰려 있다. 소위 돈이 되고 취업이 잘되는 분야에 대한 학문적 편향이 극심하여 전공자의 '순수한 호기심이 이끄는 진리탐구'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지고 있다. 몇몇 분야에 쏠림 현상이 가속화되어 학문 생태계가 균형 있게 발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학문적 공동체의 풍요로움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일전에도 한국 수학계가 세계 수학자 대회를 유치한 것이 '너무 일찍 터뜨린 샴페인'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는데 허준이 박사의 필즈상 수상 역시 우리 수학계의 짧은 역사에 비추어 '너무 이른 화산 폭발'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우리는 아직 용광로 같은 학문적 전통을 수립하지 못하였다. 학문 제1 세대와 제2세대를 거쳐 자연스럽게 축적된 지식이 제3세대 중 누군가가 내놓은 중요한 결과들에 녹아들어 근본적인 밑바탕이 되고 그것을 이해하고자 앞다투어 세계 수학자들이 한국에 와서 그의 강연을 주목할 때 그가 그의 업적이 스승들의 위대한 작업들을 통해 완성되었다고 고백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진정 우리가 세계 속에 우뚝 서게 되는 순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