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의 모티브
평범한 사람에게도 40 중반을 넘어 반복되는 일상과 늘 제자리인 자신의 그림자는 삶에 드리우는 여러 가지 보이지 않는 고통의 원인이다. 반복되는 업무, 늘 만나는 사람, 조금씩 늙어가는 자신, 반복되는 계절, 거실에 걸려있는 고흐의 해바라기 등의 익숙한 것들이 어느 순간 숨이 막힐듯한 장면으로 다가옴을 느낄 때 현기증을 느끼면서 갑자기 탁 주저앉는 중년은 자신을 속박하는 일상의 포승줄을 깨닫는다.
무엇이든 시작과 함께 사람이 들뜨고 흥분되는 것은 앞으로 전개될 새로움에 대한 적당한 긴장감과 스트레스, 그리고 변화에 대비하여 생각하고 집중하는 에너지가 나를 이끌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성을 만나는 일도 그렇다. 그리고 그 상대가 나와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는 '동족'이라면 그보다 더 설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거래처에서 늘 마주하는 여성 사원의 책상에 놓인 핸드폰의 잠금화면이 초현실주의 작가 '후안 미로'의 작품이라면 그녀가 과연 나와 일치하는 부분이 또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강렬한 호기심이 몸과 마음을 뒤흔들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체적 공통분모를 찾을 필요도 없이 서래(탕웨이 분)는 미모가 뛰어난 매력적인 여인이다. 해준(박해 일분)이 형사로서 취조하기 위해 마주 앉아 그녀의 눈을 응시하는 순간 그녀가 지닌 감성과 '꼿꼿함'이 공기를 타고 그에게 전해지는 것은 찰나지만 뇌가 본질적으로 오감과 육감을 통해 알아내려 한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는 무언가였을 것이다. 중년이란 무엇인가?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했고 반듯함을 유지해 왔으며 '품위'를 갖춘 사람이 되는데 적절한 세월을 채운 상태이다. 그와 동시에 본인의 취향과 성향을 오롯이 지각하게 되어 싦은 것과 참는 것, 좋아하는 것을 구분할 줄 알게 된 상태이기도 하다.
아내가 그전에 내가 열렬히 구애했던 짝사랑 상대이든, 중매로 만나 결혼에 골인한 상대이든, 아니면 끈질기게 나를 쫓아다닌 순애보 상대이든 그 젊은 시절의 '나'는 지금 중년의 '나'와는 달리 세상의 모든 유형의 여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백지상태의 쳥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험과 체험이 중첩되면서 '중년'에 이르러 이제 나는 나의 이상형을 어느 정도 묘사할 수 있게 되었고 아내가 나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것 또한 깨닫게 되는 시기가 '중년'이다. 아니 육체적 외형의 집착에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눈빛과 몸짓을 통해 전달되는 감정을 포착할 수 있는 감각을 지니게 된 비상한 존재로 거듭나는 시기가 '중년'이다. 그렇기에 해준은 서래의 눈빛과 몸짓을 통해 언어의 소통을 넘어서 그녀의 자아에 다가갈 수 있게 되고 그의 사랑을 '사랑한다'라는 말을 통하지 않고도 전해줄 수 있다. 그 온전한 분위기와 매너는 '중년'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의 무기이며 '젊음'과 '패기'에 대항하고도 충분히 남을 뛰어난 장점이다.
'메이슨 카운티의 다리'에 나오는 것처럼 '중년'이 어딘지 모르게 이끌리는 이성을 알아보는 것은 젊은이가 한눈에 반할 매력적인 여인에게 넋이 나가는 '짝짓기'의 차원과는 전혀 다른 영혼의 끌림이라고 봐야 한다. 아니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엄연히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가족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혹은 가족이란 울타리에 둘러싸인 '그'를 만나기 위해 적지 않은 희생을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해준과 서래는 결코 서로의 존재를 잊어버릴 수 없는 영혼의 교감을 나눈 사이다. 서래에게 잊을 수 없는 그 한마디,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트려서 아무도 찾을 수 없게"는 서래로 하여금 '헤어질 결심'을 마침내 실행시키고야 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녀는 그의 '붕괴'를 바라진 않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냉정하게 현실을 분명히 직시하는 판단력 또한 '중년'이 가진 또 다른 능력이며 나와 상대가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음을 지각하고 그 현실 위에서 행동을 만들어나가는 것 또한 '중년'이기에 박찬욱 감독의 결말이 결코 이해되지 못할 바는 아니다. 2022년 7월 25일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