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초상 3

K와의 만남, 그리고 추억들

by 오마르 왕자

‘별동대‘란 문헌을 찾아보면 고구려가 수나라를 상대로 승전한 살수대첩당시 수 양제가 동원한 110만 대군 중에서 정예를 뽑아 별도로 편성한 30만 부대를 부르는 이름으로 나온다. 나의 기억 속에서 이 단어를 잊을 수 없는 이유는 95년 학내 총학생회선거에서 ‘좌파, 주류질서의 전복자‘로 선거에 나선 여성오(당시 인문대 학생회장), 진재선(당시 법대 학생회장) 선대본부에서 활동했던 내가 참여했던 조직이 '별동대'로 불리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의 모토는 “심장은 왼쪽에서 뛴다. 좌파 주류질서의 전복자” 였는데 이 모토를 강의 수업 시작 전에 학생들이 많이 모이는 대형강의실이나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아지테이션 형식으로 (발을 구르면서 심장을 두 번 강하게 두드리며 시작했다) 주의를 환기시킨 후 단독 혹은 여러 명이 파트를 맡아 후보들을 대신해 선거에 출마한 이유를 학우들에게 설명하는 일이 내가 맡은 임무였다. 당시 인문대와 사회대 학생회는 에드가 스노의 저작 ‘대장정‘과 같은 이름을 쓰는 학생연합회가 존재하였고 이들을 주축으로 선거운동본부가 꾸려지면서 민주노총을 지지하는 민중민주 계열의 운동단체들도 선거에 합류했다. 그러면서 나도 얼떨결에 학내 선거에 참여하게 되면서 그 해 11월 붉은 깃발을 앞세우고 학내선거를 치른 결과 여성오 진재선 학생회가 꾸려졌다. 이 선거는 사실상 나의 2년의 활동에서 어떤 정점을 찍은 사건이었다. 이 선거가 끝난 시점에서 난 새롭게 1년을 꾸려나갈 총학생회에서 좀 더 많은 활동을 하면서 이쪽 길로 나아갈지 아니면 이 정도선에서 마무리를 짓고 학업으로 다시 돌아갈지 갈림길에 서 있었다. 95년 겨울, L선배가 총학에서 같이 활동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지만 함성과 구호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공허감을 일찌감치 체감했던 나는 온전히 내가 들인 노력에 의해 나의 것이 될 수 있었던 학업에 정진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당시 더 오랫동안 학생회 활동을 했던 L 선배도 몇 년 전에 ebay korea에서 IT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그러고 보면 그 이후 여성오 씨는 대치동 학원가에서 논술학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하고 진재선 씨는 사시에 합격해서 특수부 검사를 하고 있으니 당시에 활동했던 많은 선후배가 ‘운동‘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념과 현실의 간극 어딘가에 위치해 있는 인텔리 계층의 단면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본격적으로 많은 시간을 학생회 활동에 올인한 결과 2학년 때 나의 성적은 처참했는데 그렇다고 그 모든 과목들을 재수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3학년 수업은 수업대로 들으면서 나는 틈틈이 2학년 학생들과 같이 수업을 같이 듣고 재수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점점 학과 도서관에서 숙제를 하면서 머리를 쥐어뜯는 일이 일상이 되면서 2학기가 지나갈 무렵의 가을에는 몇 개의 C0과목들을 A0로 바꿀 수 있었다. 이렇게 학업에 복귀하여 정신없이 시간을 보낼 무렵 포항공대를 입학했다가 다시 시험을 봐서 대학에 들어왔던 동기인 S형이 주선해 준 소개팅에 우연히 나가게 되었다. 형과 마찬가지 이유로 포항공대를 자퇴하고 다시 시험을 봐서 경희대 한의대에 입학했던 여자 동기가 주선해서 당시 룸메이트였던 거제도 출신 아가씨 K를 소개받게 되었다.

민속주점 한 켠에서 기다리고 있던 K는 제법 두꺼운 안경을 쓰고 키도 165cm 정도 되는 당찬 구석이 있는 아가씨였다. 남자동기들이 많은 과에 다녀서 그런지 수줍어하거나 내성적인 성격은 아니었고 주량도 꽤나 세서 이야기를 함에 있어 시원시원한 면이 있었다. 96년 당시 한의대생들은 의약분업 파동으로 인한 한약조제권 분쟁에 반발해서 전국적으로 집단휴학(동맹 휴학)에 참여했고 이러한 여파로 인해 한의대생들은 유급되는 과정을 겪었다. 96년 정확히 언제 만났는지는 이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 소개팅 이후로 종로의 극장가나 대학로에서 K를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녀가 나를 맘에 들어 한 이유가 서울물을 좀 먹어서 줄줄 흐르던 촌티를 벗어던져서인지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계산적이지 못한 인간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과외를 마친 후 K의 전화를 받고 지금은 헐린 청계 고가도로를 타고 회기역에 넘어가는 일이 잦아졌다. 당시에도 무인 주점 비슷한 게 있어서 냉장고에 병으로 된 맥주들을 판매하는 가게들 혹은 통기타를 연주하시는 주인이 새벽까지 운영하던 주점에서 K를 만났던 것 같다. K가 휴학하는 동안에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터라 K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할 이유가 없었기도 했겠지만 덕분에 나는 택시비를 엄청 많이 써야 했다. 물론 지하철 첫차를 타고 집에 와서 잠깐 눈을 붙이고 학교에 수업을 들으러 가는 일도 고단한 줄 모를 정도로 연애에 푹 빠져 있었다.


K도 룸메이트와 같이 방을 쓰는 생활 때문에 내가 밤늦은 시각에 찾아와도 방에서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없는 점이 마음에 걸렸는지 97년 무렵에는 회기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혼자 살게 되었다. K가 처음 살던 곳은 회기파출소를 지나 초등학교 방면으로 가다가 우측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나오는 약간 언덕이 있던 집이었는데 소개팅을 주선해 준 언니와 룸메이트로 같이 살던 집이었다. 그러다가 회기역에 좀 더 가까운 인도변에 있는 건물의 독방으로 옮겼는데 이 건물은 밖에서 보면 전당포나 당구장이 있을 것처럼 생긴 낡은 2층짜리 상가 건물처럼 생겨서 특이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녀가 유급 이후 학기를 쉬는 기간이 끝나고 본과수업을 듣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그녀도 많이 바빠졌는지 나의 회기역 '야행'은 그 무렵 끝났다. 그 이후에는 주로 주말에만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그녀가 장학금을 받기 위해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주말에는 가끔 서로의 거리를 생각해서 남산 도서관에서 만나기도 했다. 본의 아니게 뒤쳐진 학업을 만회하느라 군 입대를 미루다 보니 군대를 가지 못하고 졸업을 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취업을 할 수는 없었고 대학원에 가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물론 전문병역요원이라는 제도를 통해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4년간 대학원 조교를 하면서 복무하는 방법이 있기는 했지만 7년이란 기간을 박사과정을 하면서 대학원에 있는 선배들의 미래가 그때에는 좀 답답해 보였다. 그래서 난 대학원 1학년이던 당시 입대를 결정하였고 그 해 12월 15일에 입대를 하라는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2학기가 체 끝나기도 전에 입대를 하게 되면서 가지고 있던 짐들 중 오디오와 CD세트집을 K에게 맡기고 나머지 책들과 옷가지는 군대가 면제였던 동기인 J에게 맡기고 기말고사가 한창이던 캠퍼스를 떠나 춘천의 102 보충대를 향해 가는 춘천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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