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초상 4

최전방에서의 네 번의 겨울

by 오마르 왕자

기말고사가 한창이던 때, 102 보충대에서 받은 주황색 운동복에 국방색 귀돌이를 하고 훈련소에서 잠을 청하면서 느낀 것은 군대밖의 세상에서의 삶이 이곳에서는 전혀 이어지지 않는다는 어떤 절연감이었다.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리는 훈련소에서 난 26개월이란 여정의 출발선 앞에 서있는 완벽한 군중들 중 한 명이었다. 미용실에서 입대한다고 하면 알아서 맞추어주는 머리길이덕에 거의 비슷한 외모를 한 국방색 전투복을 입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회에서 가지고 있었던 모든 배경을 나타내는 상징들이 제거되어 겉으로는 완벽한 수백 명 중의 한 명으로서 서있을 뿐이었다. "몇 번 훈련병 고함소리가 작습니다. 다시 복창합니다 실시!"라는 말을 듣고도 그게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인지 어리둥절하다가 소대원 모두가 얼차려를 받는 일을 몇 번 겪으면서 우리는 비로소 이름보다는 번호가 이제 "나"를 의미함과 동시에 그 이전의 "나"는 없어진 것을 실감했다.


보충대 훈련소에서 있었던 일들 중 지금도 기억나는 일은 입대 후 처음 목욕탕을 가야 했을 때이다. 겨울군번의 안 좋은 점은 날이 추워서 훈련으로 땀을 흘려도 추위 때문에 온수를 쓸 수 없어 매일 샤워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땅이 얼어서 진흙바닥에 좌로 굴러 우로 굴러를 하면서 땀을 많이 흘리지는 않았다. 그냥 차가운 바닥에서 누워서 사격훈련 자세를 갖추거나 연병장에서 집체교육을 받으면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1주일간 목욕을 못 한 병사들은 소대별로 오직 하나뿐인 목욕시설을 어떤 요일에 저녁일과 후 시간대를 나누어서 사용해야 했는데 소대별로 사용하다 보니 한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5분 정도였고 목욕탕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벗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병사들의 똥꼬냄새를 맡으며 입장 후 순식간에 몸을 문지르고 씻고 나와야 해서 엄청난 문화적 체험으로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훈련병 몇 번으로 불리다가 6주간의 군사훈련이 끝나고 더플 백을 들고 배치된 곳은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육단리의 주소를 가진 포대였다. 같이 간 동기는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은 n이었다. 전산상에 부대로 통보된 보직은 인사과 행정이었지만 대대장은 갑자기 나와 N의 보직을 교체하면서 나를 측지과로 보냈다. 아니 벙커에서 근무하는 FCC도 아닌 야전을 도는 측지과로 보내다니 순간 내무반 생활이 고될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아마도 N의 아버지가 넣은 청탁의 줄이 더 높은 선과 닿았지 않았나 싶었다. 머나먼 친척이 군 수사과에서 근무한다면서 아버지는 안심하라고 했지만 결과는 몸이 더 고된 보직을 맡게 되어 13명이 선임이 있던 측지과의 막내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대장의 판단이 전적으로 안 좋은 결과로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인사과의 행정직은 고된 훈련 같은 데서 열외가 되는 경우는 많지만 반대로 밤샘 작업을 하면서 서류 작업을 할 때도 많았기 때문에 주말에도 체력단련실에서 운동을 하거나 탁구를 치는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대대장이 말하기를 측지분과는 나보다 바로 위의 선임이 9개월 먼저 제대하기 때문에 상병 3호봉에 분대장이 된다고 하면서 1년만 잘 참으라는 당부를 하기도 했다. 주특기가 확정되자 난 전라남도 장성에 포병교육을 받으러 한 달간 가 있으면서 1호봉이 채워졌으니 한 달간의 내무반 생활은 면할 수 있었다. 측지 분과에서 주어지는 주특기 훈련이란 것은 사실 삼각함수를 이용해서 한 변의 길이를 구하는 문제라서 너무 단조로운 일이었다. 오히려 측지분과의 전문성은 사실 막노동 작업에 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군대 내의 온갖 수리할 일이나 작업을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행정보급관이 만만하게 찾는 분과가 측지 분과였다. 아침 점호에서 거의 일 년에 3분의 일은 어김없이 작업지시였다. 어디 콘크리트를 쳐라. 참호를 더 깊게 파라. 대민 지원을 나가라 연대에서 차출된 작업에 참여하라등 24년 동안 샌님처럼 책만 보고 살다가 곡괭이와 삽, 톱을 들고 이곳저곳을 누비는 막일의 삶이란 걸 경험하는 것은 나름 색다른 경험이었다. 개울가에서 등목을 하는 것을 즐기고 추운 겨울 수피령 고갯길에 눈을 치우러 올라가는 행군도 편안하게 느낄 만큼 육체적으로 단련되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군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없어져 갔다.


지금도 기억나는 대민지원은 수해복구 현장에 투입된 일이다. 철원지역에 물난리가 나면서 비닐하우스 농가에 물이 들어차 기르던 토마토들이 피해를 입은 현장에 투입되었다. 빗물 때문에 하천이 넘쳐 떠내려온 큰 돌들을 치우고 비닐하우스에서 썩고 있는 토마토 줄기들을 걷어내는 작업을 하고 난 뒤 주민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부대에서 갇혀 지내던 답답한 생활에서 벗어나 바깥바람을 느낄 수 있었던 그날이 아직 기억이 남아 있다니. 그러나 이유 없이 후임병을 괴롭히며 가슴팍을 치곤 했던 수송부의 전라도 출신 P와 역시 본인이 신병시절에 고생하던 것에 비해 한참 풀린 군번이라면서 나보다 5살이나 어리면서도 나를 괴롭혔던 Y는 지금 만나도 기억알 수 있는 존재들이긴 하다. 또 Y보다 2달 빠른 선임이었던 전라도 강진 출신의 K는 거의 씨름선수처럼 힘이 좋아 본인의 힘자랑을 하고 싶으면 나를 힘껏 껴안는 통에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몸이 힘들기도 했었다. 그런 일들을 견디다 못한 한 누군가가 상급부대에 소원신청이라도 한 날이면 한밤중에 영문도 모른 체 팬티바람으로 불려 나와 찬바람 속에 십자가 형태로 얼차려를 주었던 바뀐 대대장도 기억에 아직 남아 있다. 사회에서 만나면 주먹다짐을 해도 분이 풀리지 않을 인연들이라 웬만하면 안 보는 것이 다행일 정도다.



군대에서 받은 K의 편지들은 제대할 때 모두 모아서 나올 만큼 소중한 보물이었다. 2주 혹은 3주에 한 번씩 배달되던 K의 손 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내는 게 저녁시간의 중요한 일과였었는데 K는 내가 보낸 편지들을 어떻게 보관했을지.... 내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K는 본과생활을 끝내고 졸업을 하여 수련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도교수를 따라 러시아에도 가고 농촌의료봉사도 갔다면서 여러 사진들을 보내주었고 그런 사진들의 보면서 화장을 시작한 K의 얼굴이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휴가 때 철원 다목리에서 버스를 타면 8사단을 헌병대를 지나 수유리에 도착했는데 그럴 때마다 난 K의 숙소에서 군복을 갈아입곤 했다. 집은 너무 멀었기에 일단은 K의 집에 들러 K에게 맡겨둔 사복을 입고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곤 했다. K는 내가 군대에 간 기간 동안 대구에서 올라온 친구와 방을 나누어 쓰는 자취방으로 다시 들어갔고 학교 앞으로 숙소를 옮겼었다. 그렇지만 여기가 정확하게 어느 위치였는지는 이제는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다. 남자 친구의 부재가 주는 허전함을 공부로 잊어버린 그녀에게 나는 점점 더 과거의 대상이 되어갔던 것은 아닐지. K는 연애하던 시절만큼 나를 챙겨주는 것이 부담될 정도로 바쁘다는 이유를 편지에 적어서 보냈다. 부재가 일상이 되었을 때 군대에서 돌아온 남자 친구는 가난뱅이 대학원생이라 자신이 아깝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내가 제대하기 6개월 전부터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고 전화 연락도 되질 않으면서 난 그녀와의 이별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했다. 물론 그녀가 갑자기 경희대 한방병원의 수련의 생활을 그만 둘 리가 없었기에 그녀를 수소문하면 그녀와 만날 수 있었고 그녀의 이메일 주소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이메일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나 또한 그녀와 떨어져 서로가 없으면 못 살 것 같던 기간을 담담히 견뎌낸 후였고 이별을 아프게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로 성숙해 있었다.


혹한기 훈련을 통해 난생처음 물안개가 자욱한 파로호의 풍경을 봤을 때와 G.P. 에 측지좌표를 제공하기 위해 방문해서 실제로 북한군들을 육안으로 보았을 때, 그리고 측지 작업을 한답시고 철원 5경인 고석정, 매월대 폭포를 틈틈이 볼 수 있었던 기억들을 뒤로한 채 기나긴 겨울이 끝나가던 2001년 2월 14일 나는 비로소 전역을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군대에서 신은 공용신발덕에 옮은 발톱무좀이 그 때의 기억을 잊지 못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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