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레트, 한국 YMCA를 설립하여 청소년 운동 전개
한국에 야구와 농구 보급 및 민족 독립운동에 기여
필립 질레트 선교사 (길례태, 1874~1939)는 한국 YMCA를 창립하여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또한 이 땅에 야구, 농구를 보급하였고, 일제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는 민족운동에도 적극 협력하였다.
그는 1874년 일리노이 주 일리온스에서 태어나서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 전문학교와 콜로라도 대학을 졸업하였다. 그 후 예일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대학 내 YMCA 전도 사업을 담당하는 부목사가 되어 활동하였다.
1899년 한국 상류층 청년 150명이 언더우드에게 YMCA 창설을 강력 요구했다. 그래서 한국 선교사들이 미국 뉴욕 YMCA 본부에 한국 지사 창설을 건의했다. 그리고 현장 조사와 면담을 통해 한국 YMCA 설립이 결정되고 질레트가 적임자로 선정되었다.
질레트는 한국 YMCA 설립을 위해 1901년 9월 27세의 나이로 내한하였다. 서울 인사동 태화관을 임시 YMCA 회관으로 사용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먼저 회관을 건립하기 위해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1903년 자신의 집에서 외교관, 선교사 및 한국인 관료들을 초청하여 YMCA 설립의 취지를 설명하여 큰 공감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1903년 10월 황성기독교청년회(YMCA)를 창설하고 초대 회장에 헐버트, 부회장에 윤치호가 선임되고 자신은 총무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지속적인 모금활동을 통해 1908년 12월 종로회관을 건립하였다.
당시 종로회관은 3층 벽돌 건물로 가장 큰 현대식 건물이었다. 이곳에는 회의실, 강당 및 체육관을 두어 모임을 하고 체육활동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 후 종로회관은 민족 해방운동의 장소로서 활용되었다. YMCA 활동에는 이상재 선생 등 많은 민족지사가 참여하였고, 민족 운동과 사회 계몽운동을 활발히 추진하였다.
그는 민족운동에도 기여하였다. 1911년 일제에 의해 날조된 《105인 사건》의 부당성에 대해 세계 에든버러 선교사 대회 대회장에게 알려 정식 의제로 채택하게 하였다. 그는 이 일로 인해 일본의 감시를 받게 되고 결국 추방당하게 되었다.
그는 스포츠를 좋아하여 야구를 이 땅에 보급했다. 1904년 거처인 태화관 앞에서 미국 군인들이 글러브로 공 받기를 하는 것을 한국 사람들이 구경하는 것을 보고 야구를 선교로 활용키로 했다. 야구 장비를 보급하고, 1907년 황성 YMCA 야구단을 만든 것이 한국 야구의 시초이다. 그 후 외국인 학교에 야구부가 설립되면서 활성화되었다. 그는 야구 외 농구 및 스케이팅도 이 땅에 보급했다.
그는 1913년 6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 당해 중국으로 떠났다. 그 후 중국 남경, 상해 북경 등에서 YMCA 총무로 활동하며 간접적으로 한국 독립운동을 도왔다. 그는 1932년 YMCA를 은퇴하였고, 그 후 상해 외국인 교회 목회 및 방콕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937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미국에서 1939년 11월 심장 마비로 66세의 일기로 소천하였다.
그의 가족은 1903년 한국에서 결혼한 부인 엘렌 버타와 두 딸이 있다. 그중 1905년 영아로 사망한 딸은 양화진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