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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밀러, 교육자 및 목사로서 평생을 헌신

경신학교, 연희전문학교 및 서교동교회에서 활동

by 신재천

에드워드 밀러(밀의두, 1873~1966) 선교사는 교육 선교사로서 41년간 한국에서 헌신했다. 경신학교 교장을 역임한 후 연희 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시에 서교동 교회 담임 목사로 사역하였다. 그때 경기도 남부 지역과 충청도 지역 교회를 돌보았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루스빌에서 태어났다 . 1898년 로스앤젤레스 옥시덴탈 대학을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 3년간 신학을 공부하였다. 신학생 시절 한국 선교사로 활동하던 빈톤이 학교를 방문하여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 동기가 되었다.


그는 한국에 올 때 어머니(당시 60대)와 함께 와서 사역을 시작했고, 이듬해 같은 교회 출신이며 자신보다 4개월 전 내한한 매티 헨리와 결혼하였다.


그는 1905년부터 1913년까지 경신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교육에 헌신하였으며, 그 후 연희전문학교에서 화학 교수와 이사로 활동(1918-1942) 했다. 그는 최초로 화학을 가르친 선교사로 기록된다. 또한 1906년 지리책인 《초학지지》를 출간했는데 이 책에는 한국 및 세계 지도가 상세하게 그려져 지리 공부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1927년부터 1939년까지 서교동 장로교회 담임 목사로 (3대)로 사역하였고 행주 교회와 도내리 교회 담임을 겸직하였다. 서교동 교회에서는 전도 부인 급여를 자비로 지원하였고, 교회 재직자를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하게 하도록 교회 제도를 개선했다. 또한 응암 교회를 설립하는 등 전도 사업을 활성화했다.


교회 치리에 대해서는 엄한 면모를 보였다. 심 씨라는 성도가 불신자와 약혼하여 책벌을 받았고, 세례 문답 시 성찬의 뜻을 알지 못하거나 한글을 이해하지 못하면 탈락되었다. 성도들이 열심히 신앙 훈련을 쌓으면서 한글을 깨우치도록 엄격하게 학습 문답을 시행한 것이다.


그는 노회 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하였다. 1911년 제1회 노회부터 1930년에 이르기까지 장로회 산하의 경충 노회와 경기 노회에서 서울을 포함한 경기 남부, 청주 동편, 경기 중앙 시찰 위원 등으로 활동했으며, 공천위원, 목사장립 예식 위원, 정사 위원 등으로 노회 활동을 했다.


또한 문서 선교활동과 사회봉사 활동에도 기여했다. 초창기 YMCA 이사로 활동하였고, 1934년 기독교 서회 실행이사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몇 편의 책을 저술했는데, 1907년 《산학신편》 1914년 《천로지남》 1938년 《예수께서 구원하심》 등의 책을 편찬하였다. 1905년 편찬된 코리아 미션 필드에 많은 글을 기고하였다. 그의 글은 선교 이슈, 교육 및 여행에 대한 주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인 1941년 12월 미국 간첩이라는 혐의로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6개월간(1941.12~1942.5) 옥고를 치른 후 1942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 당하여 한국을 떠났다.


그는 미국에 가서도 한국이 해방될 때까지 교포들을 위한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한국어 방송을 담당하였다. <조금만 있으면 해방이 될 테니 한국 동포들은 끝까지 견디고 참아주시오>라는 애끓는 그의 목소리가 방송을 통해 나갔다.


그는 1966년 6월 6일 미국에서 별세했다. 그는 죽어서 한국에 묻히기를 유언하여 현재 양화진 묘역 그의 어머니 곁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부인 메티 헨리도 남편과 함께 유골이 한국에 와서 함께 안장되어 있다.


부인 매티 헨리(1873~1966)는 정신 여학교 교장으로 헌신한 선교사이다. 그녀는 미국 아이오와에서 태어나 1897년 훼어필드 파존스 대학을 졸업하고, 그 후 3년간 무디 성서 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901년 5월 북 장로교 선교사로 파송되어 한국에 와서 1902년 밀러와 결혼했다. 정신여학교 제5대 (1905-1909)와 제8대(1910-1912) 교장으로 재직하며 인재 양성에 전념했다. 그녀는 1905년 찬송가 수십 곡을 번역하고, 초기 정신 학교 교가도 작사 작곡했다. 특히 남편의 교육 선교를 도우면서 <초학지지> <산수 교과서>를 편찬하였다. 1943년 남편 귀국 시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어머니 엘리자베스 밀러(1840~1919)는 61세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따라 함께 내한했다. 아들의 사역을 도와 연희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서교동 교회에서 전도사로 헌신했다. 1919년 79세의 일기로 소천하여 양화진 묘역에 안장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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