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락, 실천하는 목회자 상을 보여준 모범 선교사
서울 승동교회 및 평양 신학교 교수, 50여 권 책 저술
찰스 클락 선교사(곽안련, 1878~1961)는 서울에서 승동교회 목사 및 경기도 동부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선교 후반기에는 평양 신학교에서 실천 신학을 가르치며 실천하는 목회자상을 구현하였다.
그는 1878년 미네소타 주 스프링 밸리라는 농촌 마을에서 태어나서 어려운 가정 상황에서 성장하였다.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2년 공부하고 노회의 추천을 받아 맥칼리스터 대학에서 남은 2년을 공부하였다. 이후 맥코믹 신학교를 1902년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는 학구열이 뛰어나 한국 선교 활동 중에도 틈틈이 공부하여 1911년 모교인 맥칼리스터 대학에서 신학박사, 1921년 시카고 대학교에서 문학박사, 1929년 철학박사를 받았다.
그는 한국을 다녀온 친구로부터 한국의 선교 상황을 듣고 선교사로 지원했다. 당시 맥코믹 신학교 졸업생 44명 중 18명이 한국 선교를 지원했으나 클락과 컨스 2명 만이 한국으로 파송될 정도로 경쟁이었다.
그는 1902년 9월 부인과 함께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가 도착할 당시 조선은 전염병이 온 나라를 휩쓸고 있었다. 천연두가 엄습하여 길거리에는 어린이들의 시체가 즐비하였고, 어린이에게 피해를 주는 성홍열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그는 이 시기에 두 자녀를 모두 전염병으로 모두 잃고 말았다.
그의 선교 전반기 20년은 서울을 중심으로 목회에 전념하였다. 서울에서 길거리 전도를 하며 사역을 시작하여 도보 혹은 말을 타고 지방까지 이동하며 복음을 전했다. 1906년부터 승동교회 2대 담임 목사가 되어 1915년까지 9년간 시무했다.
지방 전도 순회 사역도 활발히 진행하여 서울의 동부 지역인 양주, 시흥, 광주를 비롯해 멀리 강릉까지 방문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가 개척한 교회는 150여 개가 되었다. 그가 한국에서 세례를 베푼 사람은 3천 명 이상이라고 회고록에 기술하고 있다.
그는 승동 교회에 청년면려회를 조직하여 청소년 사역에도 정성을 기울였고, 주일학교 교육에도 열정을 쏟았다. 또한 음주와 금연 등 사회 정화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목회자가 교회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 현장에서 실천하는 목회자 상을 만들었다. 그는 청년 시절 건축업과 출판업을 경험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에서 사역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실천 신학의 아버지>로 언급될 만큼 목회 신학의 방향을 제시했다. 목사의 정체성으로 영적 특수성과 차별화된 자격을 언급하였고, 목사직의 요건으로 위로부터의 부르심과 준비, 영혼의 지도자 외 사회에서 교육자 및 사회봉사자로서 역할을 언급한 것이다.
그는 장터 전도를 가장 즐겼다. 그의 회고록에서 5일 만에 한 번씩 서는 장터에서 노방전도를 하는 일이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고 술회한다. 이때 전도 방법은 3단계의 전략이었다. 1차로 자신의 이국적인 얼굴로 찬송가를 부르며 사람이 모이게 만들고 2차로 한국 전도사가 설교하고 3차로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게 그가 일대일로 전도하는 방법이었다.
그의 선교 후반기는 평양신학교 교수로 활동하였다. 승동교회 시무하면서 1908년 5월부터 평양 신학교에서 실천 신학을 강의하였다. 그 후 1916년 실천신학 학과장이 되었고, 1922년부터는 평양으로 이주하여 <실천 신학>과 <기독교 교육> 분야를 가르쳤다. 1940년 평양 신학교가 문을 닫을 때까지 재직하였다.
그는 문서를 통한 전도도 말로 전하는 설교와 동등하게 효력이 있다고 강조하며 문서 선교에 열성적이었다. 1918년부터 평양신학교 간행지인 <신학지남>의 편집장 엥겔과 동역하며 편집자 역할을 수행하며, 22년 동안 <신학지남> 원고의 6분의 1을 집필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신학지남>에서 일선 목회자들에게 설교의 이론과 실제를 제공하였다.
그는 저술 활동을 활발히 하여 51권을 책을 펴냈는데 그중 42권이 한국 교회를 위한 내용이었다. 20여 권은 <설교학>, <강도 요령>을 비롯한 실천신학 교제였고, 그 외 주석서를 비롯한 성경 연구에 필요한 책들을 편찬하였다. 영어로는 7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한국에서 맺은 첫 열매들>(First Fruits in Korea)과 <한국의 전통 종교들>(Religions of Old Krorea), <한국 선교사역에 네비우스 정책>』(The Nevius Plan for Mission Work in Korea) 등을 저술했다. 1934년 이후 장로교의 <표준 주석> 발행 책임자로 구약 18권과 신약 3권을 집필하였는데, 그중 5권이 발행되었다.
그는 1941년 63세에 일제의 선교사 강제 추방으로 미국 오클라호마로 돌아갔다. 1948년 선교사 직을 은퇴하고 성경 주석을 집필하였으며, 1961년 83세로 소천하였다.
그는 미국 생활 중 1954년 76회 생일날 <선교사 60년 회고록>을 완성하였는데, 교계에 알려지지 않다가 총신대 박용규 교수가 맥코믹 대학교에서 유연히 발견하여 <신학지남 1993년 겨울호>에 번역 기고하면서 알려졌다.
서울에서 태어난 2자녀도 모두 대를 이어 한국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아들 알렌 D. 클락(곽안전)은 1933년 내한하여 만주와 청주에서 농촌지역 전도활동에 헌신하였다. 장신대 교수, 피어선 대학교 교장 및 대한 성서공회 번역위원으로 활동했다.
딸 캐서린은 1947년 내한하여 경부 안동에서 의료 구제품 배급을 담당하였으며 한국 전쟁으로 일본에 피신 후 다시 돌아와서 1953년 대구 선교부에서 대구 계명대학교 설립에 기여하였다. 그녀는 계명 학원 초대 이사로 활동하다가 1968년 귀국했다.
그는 한국에서 16명의 양자(딸 9, 아들 7명)를 두었는데, 모두 그리스도를 위해 혹은 나라를 위해 훌륭한 삶을 살아냈다. 이 중에는 평양신학교 최초의 교수 남궁혁과 부통령을 역임한 함태영 목사도 그의 양아들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