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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어, 평양 대부흥회 주 설교자로 활동

40년간 이 땅에서 헌신, 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선 선교사

by 신재천

윌리엄 블레어(방위량, 1876~1970) 선교사는 평양을 중심으로 48년간 이 땅에서 헌신하였다. 평양 대부흥회 주 설교자였으며. 신사 참배를 강력히 반대하였고, 찬성의 고백 등 많은 책을 저술하여 우리에게 읽히고 있다.

그는 1876년 캔자스 주 샐리나에서 태어나서 웨슬리안 대학과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받았다. 그는 맥코믹 신학교 재학 중 스왈론 선교사의 선교 강연 및 그의 개인적 추천에 의해 한국 선교를 결심하였다. 특히 스왈론 선교사와 면담을 통해 언어 장벽을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생겼고, 약혼녀인 에디스의 적극적인 후원이 큰 힘이 되었다.


그는 1901년 9월 북 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평양 선교부로 배치받아 숭실 학당에서 체육 교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평양을 중심으로 평양 서북지역 5군을 순회 전도하면서 57개 교회를 개척하였다.


1905년부터 평양 사창골 교회에 시무하면서 평양 대부흥회를 맞았다. 그는 1907년 평양 대부흥회에서 저녁 예배를 인도하며 성령의 불길을 지폈다. 1907년 1월 12일 장대현교회에서 고린도전서 12장 27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몸이요, 그의 한 지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3일 후 성도들이 눈물로 회개하고 죄를 고백했다.


그는 그레함 리와 함께 평양 부흥회의 설교자이며 인도자였다. 또한 1909년부터 일어난 백만인 구령운동과 1919~1935년의 기독교 진흥운동에서도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교육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01년 첫 사역인 숭실 학당 교사를 시작으로 평양 신학교에서도 학생을 가르쳤다. 또한 1908년과 1923년 미국에 가서 학교 건축 모금활동을 전개하여 숭실 대학교와 평양 신학교의 건물을 신축하였다. 1934~39년에는 숭실대학교의 교수 및 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한 주역이다.


그는 저술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여 5권의 저작과 30여 편의 논문을 저술하였는데, 그중 2권은 한글 번역본으로 출간되었다. 1910년 작성한 <The korean Pentecost>는 1977년 사위 한부선(Bruce Hunt)에 의해 내용을 보완하여 출판되었고, 번역판도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평양 대부흥회의 회개의 역사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1946년 《Gold in Korea》을 발간하였는데, 이 책은 <속히 예수 믿으시기를 바라나이다>라는 제목으로 1995년 출간되었다. 원제목에서 언급된 금(Gold)은 산이나 모래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이 책에는 러일전쟁 등 한말의 시대적 상황과 문명에 눈뜨는 한국인의 모습과 신앙생활에 대해 선교사의 시각에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1959년 저술한 <찬성의 고백, Chansung`s confession> 은 평양 대부흥회 이야기를 실화 소설로 기술하였는데, 1961년 클락(곽안련) 선교사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주인공 찬성을 통해 일어나는 신앙과 삶의 이야기가 당시의 시대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백>이란 제목으로도 번역되어 출판되어 있다.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결연히 거부하다가, 1942년 강제로 출국당했다. 그 후 1946년 해방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2년간 대구에서 사역한 후 1949년 한국에서의 48년 사역을 마감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에 거주하는 동안 공산주의 정권하에 놓인 평양의 교회를 재건하려 노력하였으나 소련의 반대로 이루지 못한 채 귀국했다. 그는 미국에서 거주하다가 1970년 5월 로스앤젤레스 두란트에서 소천하였다.


그의 동생 허버트 블레어(방혜법)도 1904년 입국하여 평북 선천과 강계 지역에서 헌신하였고 1914년 대구로 이동하여 대구 서부교회 담임 목사로 사역하고 상주 지역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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