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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 부산에 복음을 전한 호주 대표 선교사

부산진 교회 개척하고 울산 지역에도 전도

by 신재천

겔슨 엥겔 선교사(왕길지, 1868~1939)는 부산진 교회를 설립하고, 부산 및 경남 동남부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장로교 총회장으로 활동한 믿음이 거장이다. 선교 후기에는 평양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인 목사 양성, 문서선교 및 성경 개정 활동에 헌신하였다.

그는 독일 남부 부르텐부르크에서 태어나서 뉘팅엔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1889년 바젤 선교회에서 선교 교육받고 에든버러에서 훈련받았다. 그는 사범학교 시절 바젤 선교대회 참석한 후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 바젤 선교회는 경건주의 신앙을 기초로 하는 당시 대표 선교 단체였다


그는 1892년 6월 바젤 선교회에서 목사 안수받고, 인도 푸나에서 교육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곳에서, 남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했고, 호주 선교사 클라라를 만나 결혼하였다. 그러나 6년간 선교 활동을 하는 도중 건강이 악화되어 인도에 거주할 수 없어 부인의 고국인 호주로 갔다.


그 후 호주 빅토리아주 스와웰에서 머물면서 그곳 하버드 대학에서 학장으로 2년간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는 40년간 선교에 헌신하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에 선교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결국 1900년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의 한국 선교사 모집 소식을 듣고 지원하여 파송받았다. 호주 여 선교회에서 한국으로 파송된 선교사들의 활동을 통합하고 단일화하라는 과제가 그에게 주어졌다.


그는 1900년 10월 부인과 어린 3자녀를 데리고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의 가족은 호주 여선교사들의 거처에 함께 거주하면서 호주 선교회 단합을 중재하였다. 먼저 내한한 여선교사 그룹과 아담슨 선교사와의 갈등을 중재하고 협력토록 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어를 빠르게 배워서 1달 만에 축도를 한국말로 시행하여 한국인 성도들을 감동시켰다.


그는 한국의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면서 부산을 두 지역으로 구분하여 동부 지역을 담당하였고, 먼저 부임한 아담슨은 서부 지역을 담당하도록 역할을 나누었다.


그는 1901년 3월부터 부산 동래를 비롯하여 기장, 언양, 울산, 함안, 김해 밀양, 창녕 등 경남 동부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여러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부산진 교회, 동래 안평 교회, 수안 교회, 기장 교회, 장전리 교회, 금사 교회, 송정 교회 등 그가 설립한 교회이다.


그는 지방마다 성도들에게 성경 공부반을 조직하고 성경을 가르쳤다. 그는 교육에도 적극적이어서 호주 여 선교사에 의해 시작된 일신여학교 2대 교장으로 1902에서 1913년까지 헌신하였다.


*일신여학교는 1895년 호주 여 선교사 멘지스와 페리에 의해 설립되어, 멘지스가 초대 교장을 역임했다.


1906년 부인 클라라가 건강이 악화되어 호주로 치료차 갔으나, 끝내 완치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 후 1년간 호주에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재무장하는 시간을 가지다가, 1907년 7월 안식년을 맞아 호주에 머물던 아그네스 브라운과 재혼하였다. 그리고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 아그네스 브라운(1868~1954)은 1895년 12월 부산에 와서 활동한 호주 선교사이다. 성격이 명랑하고 강한 체격을 가져 한국인과 친밀하게 지낸 선교사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간호원으로 활동하면서 복음을 전하였고, 전도 부인을 훈련하였다. 엥겔과 결혼 전에 부산에서 함께 사역하여 잘 알던 사이였고, 결혼 후 남편과 함께 부산 선교에 헌신하다가 1937년 엥겔과 함께 귀국했다.


그는 한국에 돌아온 후 기존 시역을 이어갔으며, 1909년에는 26개 지역 교회와 울산의 6개 신앙공동체를 섬기며 복음 전도에 힘을 쏟았다. 1913년에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2대 총회장에 선출되어 1년간 헌신하였고, 그 후 경상 노회장과 경남 노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그가 담임하던 부산진 교회의 심취명을 평양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하여 목사로 양성하였다. 심취명은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배출된 한국인 목사이며, 1914년 부산진 교회 2대 담임목사가 되어 사역하였다.


그의 선교 후반은 평양 신학교 교수로서 시역 하였다. 1907년부터 평양신학교 교수로 활동했는데, 부산에서 시역 하면서도 매년 3개월은 평양에 머물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1918년부터 평양으로 거주지를 옮겨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1918년 평양신학교 간행물인 <신학지남>을 창간하였고, 그는 신학지남에 27편의 논문을 기고하였다. 그는 신학교에서 원어를 잘하는 학생을 좋아했고, 잘못한 학생이 있으면 철저한 징벌을 가하는 등 독특한 성격으로 학생들에게 회자되었다.


문서 사역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부터 구약성경 개혁본 작업에 참여하여 1936년 《구약전서 개혁》 출판에 기여하였다. 조선 예수교 사기 편집장으로 활동하여 1928년 《조선 예수교장로회 사기》를 편찬하였다. 찬송가 편찬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아담스와 함께 장로교회 헌법을 제정하였다. 또한 귀국할 때까지 숭실대 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1937년 3월 37년의 한국 사역을 마무리하고 호주 멜버른으로 돌아갔다. 호주로 돌아간 지 2년 만인 1939년 5월 72세의 일기로 소천하였다. 그는 한국 및 인도에서 총 43년을 선교사로 봉사하여, 하나님께 약속한 40년의 선교를 지키고 하나님 곁으로 돌아간 것이다.


호주 선교부는 <엥겔에게는 배우는 것이 그의 열정이었고 가르치는 것은 본능이었다. 그의 마음은 항상 풍성했으며 순수한 그의 기질은 그에게 계속 남아있었다.>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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