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보탐, 대구에 피아노를 최초 가져온 선교사
안식년 기간 중 미국에서 가스 폭발 사고로 소천
리처드 사이드보탐 선교사(사보담, 1874~1908)는 대구 및 부산에서 8년간 사역하며, 이 땅에 최초로 피아노를 가지고 온 선교사이다. 안식년으로 잠시 미국에 머물 때 가스 폭발 사고로 소천하여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영국 비글스웨이드에서 태어나 9살 때 미국 미시간 주 레이트시티로 이주했다. 미시간 주 엘마 대학을 졸업 후 프린스턴 신학교를 1899년 졸업하고, 그해 목사 안수받았다. 그의 선교사 동기는 대학 시절 학생 자원 운동(SVM) 영향을 받았다. 그는 1899년 6월 에피 엘슨과 결혼하고, 그해 9월 북 장로교 선교사로 임명받았다.
1899년 11월 25세 나이로 한국에 와서 대구 선교부로 배속되었다. 한국어 공부를 하면서 대구 제일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하여 1년 활동했다. 그러나 부인의 건강 문제로 비교적 공기가 좋은 부산으로 1900년 11월 이동했다.
사이드보탐 선교사 부부는 최초로 우리나라에 피아노를 가져온 선교사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이삿짐이 1900년 3월 대구 달성군 사문진 나루터(화원 유원지)에 도착했을 때 피아노가 있었고 상여를 들듯이 여러 일군들이 높이 들어서 대구로 이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피아노는 대구 제일 교회로 이동되었으며, 이동 중 많이 망가져서 수리하여 사용했다. 그 후 사이드보탐 부부는 부산으로 이동하면서 피아노도 부산으로 갔다. 피아노 반입에 대한 기록은 1990년대 발견되었는데, 그 후 달성군 화원 유원지에는 해마다 피아노 축제가 열리고 있다.
그 후 7년간 부산 서부 및 경남 김해, 밀양, 창녕 등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영선정 교회(현 초량 교회), 절영도 교회(현 제일 영도 교회), 자갈치 교회(현 항서 교회) 개척에 기여하였고, 1904년 김해 일천 교회, 1906년 창녕 오호 교회, 합천 초계 교회 설립에 기여하였다. 그는 당시 40여 개 교회를 순회하며 설교하고 세례를 주었다.
또한 한센병 환자 사역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04년 한센병 선교회 멤버로 참여하여 1906년 부산 상애원(최초 나환자 수용소) 설립과 1910년 부산 한센병 병원 설립에 공헌하였다.
* 한센병 선교회 멤버로는 어번, 빈톤, 스미드 선교사가 있다.
1907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 래피어로 일시 귀국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가스 폭발 사고가 일어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1908년 12월에 일어난 일로서 향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안타깝게 하늘나라로 갔다.
부인 에피는 1년 후 선교사 직을 사임하고 두 자녀를 양육하며 미국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녀는 한국을 잊지 못해 한국을 찾아와서 순회 강의하였고, 그때 두 자녀에게 한복을 입혀 그녀의 한국 사랑을 표현한 사진이 남아있다. 2009년 사이드보탐의 외손녀에 의해 할아버지의 유품이 한국으로 보내져서, 현재 부산 근대 역사관에 보관되어 있다. -끝-
*추가 : 사이드보탐 부부의 피아노가 부산으로 이동하여, 대구에는 1901년 5월 에디트 파커(존슨 부인)에 의해 새로 피아노를 들여와 피아노 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존슨 부인의 피아노는 대구 신명여고에 기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