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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밀러, 평생 한글 성경 발간과 보급에 헌신

한국 성서공회에 초대 책임 선교사로 활동

by 신재천

휴 밀러 선교사 (민휴, 1872~1957)는 평신도 선교사로 내한하여 38년간 성서 인쇄 및 보급에 헌신했다. 그는 전국을 다니며 성경에 소외된 지역에 권서를 파견하여 성경을 보급하고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졸업하고 가정 형편상 대학을 다니지 못하고 상점에서 일했고, 교회에서는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였다. 그리고 23세에 캐나다 할리팍스로 이주하여 도매 무역회사 서기로 근무했다. 그때 캐나다 최초 순교자 맥켄지가 다녔던 찰머스 교회에 출석하였기에 한국에 대한 선교 소식을 접하였고 한국 선교사의 꿈을 키웠다.


1899년 언더우드로부터 자신의 비서로 한국에 오라는 제안을 받고 한국에 왔다. 그는 목사가 아닌 평신도 선교사로 내한한 것이다. 한국에 도착 후 언더우드 비서로서 사역을 시작했다. 또한 당시 언더우드가 발간한 주간지 《그리스도 신문》을 전국에 보급하고 요금을 거두는 일을 하였다.


1901년 언더우드가 건강 문제로 잠시 귀국하면서, 9월부터 영국성서 공의회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평생 성서 발간 및 보급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 영국 및 스코틀랜드가 각각 성서공회를 운영하였는데 1904년 연합하여 대한 성서위원회를 조직하고, 연합지부를 만들었는데, 영국 성서공회 켄뮤어가 초대 연합 총무가 되고 그가 부총무가 되었다.


1905년 켄뮤어가 신경쇠약으로 인해 영국으로 귀국하여 부총무인 휴 밀러가 후임 총무가 되어 1907년 연합 공의회가 해체될 때까지 활동하였다. 이때 45만 권의 성경이 반포되었다. 연합지부가 해체된 후 그는 영국 성서공회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당시 성경을 전국에 배포하기 위해서는 권서들이 역할이 매우 컸다. 권서들이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성경과 전도지를 나누어 준 것이다. 그는 200명의 권서를 관리하는 권서의 아버지 역할을 하였다. 1915년 권서 총회를 개최하였는데 177명이 참석한 기록이 있다.


그는 성경이 보급되지 않는 지역을 찾아 성경을 배포하였다. 1906년 강원도가 소외된 지역이기에 고재범을 강릉에 파견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옥계 조월평 교회, 망상 교회, 삼척 교회 등이 개척되었다. 그리고 1918년에는 블라디보스톡에도 권서를 파견하여 성경을 보급하였다.


1919년에는 미국 성서공회가 철수하고 모든 사역을 영국 성서공회로 이관받아 한국 성서 보급 업무를 모두 관장하였고, 1919년 한국 복음주의 선교회 회장으로 사역하면서 일본의 기독교 정책에 대해 많은 건의를 하였다. 특히 사립학교에 한국어 교육을 유지토록 건의하여 관철시켰다.


밀러는 성경 번역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성경 번역에는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신구약 성경이 인쇄되고, 또한 1937년 개역이 완성되도록 뒷받침하였다. (개역 성경은 1938년 발간)


그는 신구약 개역이 완성된 1937년 9월 은퇴를 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 워싱턴 시와 버지니아 시에서 거주하다가. 1957년 향년 85세로 소천하였다.


YMCA 강당에서 거행된 그의 은퇴식은 윤치호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많은 축하와 선물이 주어졌다. 이때 그의 사역을 기록한 <민휴 선생 일기>가 그에게 주어졌다. 그는 한국 선교 30여 년을 오로지 성경 반포 사역에 헌신한 것이다. 현재 대한 성서 공의회에는 그의 기념 초상 동판이 설치되어 있다.


부인 넬리 피어스는 북 감리회 선교사로 1897년 내한하여 이화학당 교사로 3년 근무하였고, 전도부인 양성학교를 운영하였다. 1904년 결혼 후 남편의 사역을 도왔고 진명학교, 이화 여전 등에서 성경 및 음악을 가르쳤다. 1937년 밀러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1948년 소천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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