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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재천 Apr 03. 2024

샤프, 공주 및 논산에서 복음 전하다가 3년 만에 순교

부인 사애리시는 유관순을 양육하여 인재로 배출

로버트 사프 선교사(1872~1906)는 공주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한국 온 지 3년 만에 전염병으로 순직하였다. 그러나 부인 사애리시가 그의 뜻을 이어받아 공주 영명 여학교를 설립하고 충남 지역에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1872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태어나, 1887년 브루클린 유니언 선교사 양성소를 졸업하였다. 1900년 오벌린 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오하이오주 벤필드의 한 교회에서 사역자로 일하였다. 1903년 대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북 감리회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는 1903년 3월 서울에 도착하여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5월에 서울에서 무어 목사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후 정동 제일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배재학당 교사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YMCA 활동에 참여하여 1903년 10월 서울 YMCA 초대 이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함께 선교사 교육을 받고 한국에 먼저 와서 사역하던 앨리사(사애리시)와 1903년 결혼하였다. 결혼식은 이화학당 강당에서 거행되었다.


그리고 1904년 공주 선교부 책임자로 임명되어 부부는 함께 공주로 이사하여 공주 최초의 서양식 벽돌집을 건축하여 거주하였다. 당시 양옥집을 구경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이때 복음을 전하였다.


공주는 스웨어러 선교사가 최초 방문하였고 1903년 맥길 선교사가 공주 제일 감리교회 및 자혜병원을 설립하여 헌신하였다. 맥길은 샤프와 함께 사역하다가 1905년 귀국하였고, 샤프가 이어받은 것이다.


그는 공주에서 헌신적으로 인근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1906년 2월 강경과 논산 지역을 전도여행하다가, 추운 겨울날 진눈깨비를 피하려고 인근 상엿집에 잠시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장티푸스에 전염되고 말았다. 그를 치료하기 위해 의사들이 노력하였으나 그해 3월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시신은 공주 영명 동산(영명 학교 뒤 산)에 안장되어 있다. 샤프 선교사는 한국 온 지 3년 만에 순직한 것이다.

그의 아내 엘리사 사프(사애리시)는 당시 슬픔과 충격으로 1906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미국으로 돌아가는 날 공주 제일 교회와 영명 여학교는 온통 눈물바다였다고 전해진다.


그 후 그녀는 남편이 잠든 공주를 잊지 못하여 1908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충남 지역 복음화 및 교육을 위해 40여 년 헌신하였다. 그녀는 공주 영명 여학교를 비롯하여 논산, 강경, 천안 등에 많은 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을 교육했다. 특히 병점 지령리 교회에서 만난 유관순을 수양딸로 삼아 영명 여학교와 이화 학당에서 공부하게 하여 훌륭한 민족 지사로 양성한 것은 그녀의 위대한 공로이며 하나님의 일하심인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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